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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의 50대, 편안함을 버린 '뉴욕시기'

유앤미나 2017. 4. 11. 23:46
김환기의 50대, 편안함을 버린 '뉴욕시기'
예병일이 노트지기의 다른 글 보기2017년 4월 10일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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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뉴욕에서 처음 당한 것은 혹평이었다. 1964년 개인전에 대해 뉴욕타임스(NYT)는 “동아시아적 특색이 없고 질감이 지나치게 두텁다”며 신랄한 단평을 했다. 
김환기는 발끈해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 미술계 리더 중 한 사람이자 홍익대 미대 교수로서 많은 벗들과 지지자에 둘러싸여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뉴욕에 남았다. 쉰이 넘은 나이에 과거의 명성과 지위를 뒤로하고, 그야말로 ‘계급장 다 떼고’ 현대미술의 전쟁터와도 같은 뉴욕에서 싸웠다. 
 
문소영의 '김환기 '고요' 숭고와 순환의 전면점화, 뉴욕시기 고독 끝에 피워낸 꽃' 중에서(중앙선데이,2017.4.9)
 
(예병일의 경제노트)
한국 추상미술의 대가 김환기(1913~1974). 얼마전 최순실 사태의 여파 때문에 올해로 계획되어 있던 삼성미술관 리움의 대규모 김환기 회고전이 취소되면서 그의 이름이 언급됐었지요. 김환기의 작품 '고요'(Tranquility)가 서울 강남 신사동 K옥션 전시장에서 경매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이 그에 대해 글을 썼더군요.
 
김환기는 1913년에 태어나 197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963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한 후 뉴욕으로 갔습니다. 그러니 김환기의 '뉴욕시기'(1963~74)는 그의 50대이자 삶의 마지막 시절이었던 셈입니다. 
김환기는 뉴욕에서 자신이 목표로 했던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미술'을 이루기 위해 완전추상으로 전환했습니다. 하지만 첫 반응은 혹평이었습니다. "동아시아적 특색이 없고 질감이 지나치게 두텁다."(뉴욕타임스)
 
문소영 부장은 이에 대해 김환기가 발끈해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었지만, 뉴욕에 남았다고 표현했습니다. 홍익대 미대 교수이자 한국 미술계의 리더였던 그가, 50세가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한국에서의 명성과 안정을 버리고 전쟁터 뉴욕에서 싸우기로 결정한 겁니다. 그리고 뉴욕의 혹평에 무너지지 않고 수용할 것은 수용하며 만들어낸 것이 그의 70년대 전면점화였습니다.
 
어제 일요일 아침, 쉰이 넘은 나이에 편안함을 택하지 않고 뉴욕에 남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도전'을 계속했던 한 화가를 생각했습니다. 저도 오십대여서인지,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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