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서울 종로에 있는 한 세무사의 사무실을 방문한 일이 있었다. 나를 만난 세무사가, 자기 사무실로 오다가 혹시 손기정 옹을 뵈었느냐고 물었다. 못 보았다고 했더니, 조금 전에 그 사무실을 다녀가셨다고 얘기하면서 이제는 많이 늙으셔서 지팡이를 짚고 다녀가셨다는 것이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그 어른께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보다도 연세가 높았기 때문이다.
세무사는 그분을 보내드리고 나서 자기 마음이 무거운 반성에 잠기게 되었다고 했다.(38쪽)
(예병일의 경제노트)
제 가까운 주변에 팔순이 넘은 분이 계십니다. 종종 지하철을 타시는데, 무료 이용이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항상 요금을 내십니다. "부자는 아니지만 요금을 낼 수 있는 형편이니, 큰 액수는 아니지만 나라를 위해 내고 타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2002년 돌아가신 손기정 옹. 일제치하의 어두웠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영웅이었던 그 분에 관한 일화가 김형석 교수의 책에 있더군요. 김교수가 한 세무사의 사무실을 방문했는데, 그가 조금 전에 다녀간 손기정 옹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연로한 손 옹이 지팡이를 짚고 찾아와 세무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 선생, 바쁘지 않으면 나를 좀 도와줄 수 있겠어? 내가 요사이 어디서 상을 받은 것이 있는데, 상금도 생겼다고. 그래서 공짜로 생긴 돈이니까 세금을 먼저 내고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왔는데, 좀 도와주었으면 좋겠어."
세무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은 연세도 높고 직업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신고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랬더니 손 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럴 수는 없지. 내가 지금까지 한평생 얼마나 많은 혜택을 국가로부터 받고 살았는데. 세금을 먼저 내야지. 내가 이제 나라를 위해 도움을 줄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아?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 말을 들은 세무사는 세금을 계산해 보여드렸습니다. 내역을 살펴본 손 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것밖에 안 되나? 그렇게 적은 돈이면 내나 마나지. 좀 더 많이 내는 방법으로 바꿀 수는 없나?"
세무사가 다시 법적으로 가장 많은 돈을 낼 수 있는 방법으로 계산해드렸더니, 손 옹은 그제야 만족해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됐어, 그만큼은 내야 마음이 편하지..."
정부나 재계의 유력 인사들이 '교묘한 절세'에 골몰하고, 나아가 탈세를 하는 모습이 언론을 통해 자주 보도되고 있는 요즘입니다. 물론 공직이나 재계에도 손기정 옹처럼 사익만이 아닌 공동체의 의미를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개인의 이익 극대화에만 골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공헌'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분들이 인정받고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와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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