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있는 삶
이번 재·보선 선거로 인해
야당 공동대표의 사퇴와 함께
여러 변화가 일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손학규 고문의 소식이
개인적으론 가장 안타까웠다.
그는 이번 재·보선에서 패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
가장 먼저
부인에게 전화 걸어
‘이제 난 자유인이 됐다’는
말부터 꺼냈다고 한다.
그런 후에
다음 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손 고문은,
‘국민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만들어드린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송구스럽다’
그리고
‘이 시간부터
시민의 한 사람으로
저녁이 있는 삶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
내가 요사이
정치인에게 들었던 가장 참신한
말이었다.
물론 그가 말한
‘저녁이 있는 삶’이란
자신의 저서에서도 밝혔듯이,
돈을 벌기 위해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고 대화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이분법적 구도를 반대하는 가치,
이념적으로는
‘진보적 자유주의’의 새로운 길이며,
내용적으로는
정의, 복지, 진보적 성장의
가치를 묶는 ‘공동체 시장경제론’을
의미했지만,
나는 ‘저녁이 있는 삶’이란
조금 다르게 와 닿았다.
저녁이 있는 삶의
가장 큰 모토는 무엇보다도 가족이다.
저녁에 가족끼리
오손 도손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할 수 있는
평화롭고 여유로운
삶과 휴식이 있는 내일이 있는 삶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어느 통계를 보니
우리나라는 가족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횟수가 주 2회정인데,
미국에선 평균 주 5회 정도
가족이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고 한다.
오바마 대통령은
오후 6시 반을 가족과의 저녁식사
시간으로 정해놓고
이 규칙을 엄격히 지킨다는
사실이 우리에겐 놀랄 뿐이다.
우리 생활양식도
어느 덧 서구화 되면서
부부가 같이 일하는 가족이 늘어가면서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가장 기본적인 일로 여겨지는
식사조차도 함께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식구(食口)란 무엇인가.
한 집에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이란
뜻임에도 우린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저녁도 같이
못 먹는데 나중에 과연
‘저녁이 있는 삶’을 기대할 수 있을까.
물론 형편상 함께 저녁을
못 먹는다 해도
최소한
가족 공동체 일원임을 느끼게 하는
모임은 규칙적으로
가져야만
내일이 있는 삶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느 부부는
여름휴가 기간임에도 집에 있기에,
‘왜 어디라도 떠나지 않나요?’
물었더니,
‘우리 부부끼리 무슨 재미로 가요
휴가가 아니라 싸움만 하고
올텐데요...’
이 모습이
지금 우리의 자아상이다.
그만큼 부부가 함께하는 시간이
없었기에
눈물나도록 애톳한 사랑은커녕
부부의 정조차 느낄 수 없기에
같이 휴가가길 거부한다면
단언컨대
‘저녁이 있는 삶’은 기대하기 어렵다.
저녁이 있는 삶이란
연금만 갖고 안 된다.
집만 갖고 안 된다.
자식만 갖고 안 된다.
저녁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인정
그리고
믿음과 섬김이 있어야
비록 해는 져가지만
황혼이 더 아름다울 수 있는 법이다.
어느 부부는
환갑 때 자녀들이 해외여행을
보내드렸는데
첫날부터 싸움만 하고 왔다는 애기를 들었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평소 같이 해본 일이 드물기에
몇 일 동안의 여행도
두려워하는 부부가
긴긴 노후를
어떻게 행복하게 보내겠는가.
에릭프럼은
사랑을
관심, 이해, 존경, 책임이라는
네 단어로 요약했다.
사랑은
하루아침에 할 수 없는 일이다.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이해해야만
존경할 수 있고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내일로 미루면 안 된다.
지금
저녁도 같이 먹고
산책도 같이 하고
커피도 같이 마시고
영화도 같이 봐야
‘저녁이 있는 삶’을 살며
‘천국이 있는 삶’을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은 ‘같이한다는 것’이다.
혼자 하면 쉽다.
혼자가 훨씬 효율성 있을 때가 더 많다.
하지만
적어도 지천명(知天命)이 되고선
되도록 함께 하도록
해야 한다.
머리로는 이 진리를 알면서도
나이가 들었음에도
왜 그리도
같이 한다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지지만
알고 보면 간단하다.
포기(抛棄)하면 된다.
젊었을 때 인생은 능동태였지만
나이가 들면 인생은
자연스럽게 수동태로 바뀌게 된다.
왜 그럴까.
살면 살수록 인생은
내 생각대로 안 된다는 것을 알고선
누가 말 안 해도
미리 포기해 버린다.
그래야 마음 편하고 관계도 형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왜 이렇게 포기할 것이 많은지
때론 깜짝 놀라기도 한다.
내가 그토록 의지했고 사랑했던
그 무엇까지도
깨끗하게 포기해야만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온다.
<비우니 행복하고
낮추니 아름다워라>라는 이채님의
시가 있다.
나는 내용보다
제목이 너무 맘에 들었다.
마음을 비운다는 일,
쉽지 않은 일이지만
자신을 낮추기란
더욱 더 어려운 일이지만
행복하고
아름다운 저녁이 있는 삶을 살길
원한다면 누구라도
이 법칙을 벗어날 수는 없다.
마음을 비움으로 대박 난 책이 있다.
<내려놓음>은
2006년에 74만부가 팔렸던
기독교계 대표적 스테디셀러는
당시 영향력이 대단했었다.
저자인 이용규 선교사는
서울대와 하버드를 졸업한 재원이었지만
신의 부르심에 순응하여
몽골에 가서
철저히 내려놓으니 하나님이 움직이셨고
움켜잡으면 소멸되는 것들을
내맡기니 풍성해지더라는
내용이었다.
놀라운 일은
이 책 판매 이후에
TV 토크쇼 게스트들이
자신의 삶을
반추하면서 ‘내려놓았다’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마음 비우니 빵빵 터지네요’,
‘마음 비우니 골프가 행복합니다’,
‘내려놓고 비우니 더 크게 채워 주더라’,
‘마음 비우니 행복이 채워집니다’ 등
재산과 유명세 등을
내려놓을 때
새로운 삶이 나타났다는 고백들이
줄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생이 행복해지는 비밀이
여기에 있었다.
행복한 삶은
외적인 환경보다는
철저한
내려놓음에 있었다.
올빼미는 저녁이 되어서야
비로소 날개 짓을 하듯,
저녁이란
단순한 종말을 의미하지 않고
새로운 출발을 약속한다.
‘저녁이 있는 삶’이란
가족과 휴식이 있는 삶이요,
영적 가나안이 있는
여유로운
인생이라 할 수 있다.
주여,
날마다
쫓기는 삶 속에서도
저녁이 있는 삶이
되길
원합니다.
더 내려놓게
하소서.
더
자신을 부인하고
더
자신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감당케 하소서.
저는 당신의 말씀을
믿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2014년 8월 5일(화)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