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스크랩] 집의 가치는 / 조성원

유앤미나 2012. 7. 28. 21:46


집의 가치는 / 조성원



어설피 내리는 봄비. 우산을 받칠 것도 없이 대학교가 있는 뒷산에 올랐다. 소량의 비도 새봄엔 큰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산불 말고도 내일은 금세 달라질 산천초목이다. 작은 동산에 깊숙이 들어섰다. 솔 향이 묻어난다.솔 향이 진하다 하여도 초입부터 향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무엇이든 시간과 깊이가 필요하다 싶다. 그 쯤 솔 향 말고도 찾아든 것이 또 하나, 바로 적막함이다.

적막이 덮은 숲의 깊이에서 들리는 산새 소린 가히 예술이다. 비록 작은 숲이지만 듣고 보는 모든 것들이 한 느낌의 사유다. 어느새 날은 개어있다. 고개를 들었다. 소나무가 나를 본다. 보일락 말락 겨우 보이는 창공의 틈은 멋이 난다. 푸르다는 것이 어찌 처음인 것 같이 자꾸 보게 된다. 빽빽이 에워싼 주변이 시간을 고립한다. 고립하여서도 충만하다는 것이 좋다. 혼자라는 것을 담백하게 느끼는 때가 요즘 별로 없지 싶다.

헌데 예전 같지 않게 분청 색 고운 빛이 나무 사이 아래서 비친다. 가만 보니 소담하게 단장한 외래풍의 고급건물이다. 하필 왜 이런 곳에. 하지만 집으로선 저처럼 좋은 위치는 없지 싶다. 공기 맑은 한적한 곳에 찾아들 것은 명상곡 같은 우아함이다. 솔잎을 배경삼은 하얀 벽에 회색 지붕 그리고 단아한 붉은색 벽돌. 유럽에 온 기분이다. 유럽의 집들은 철저히 독립적이고 번듯한 것이 자신만만하다. 한 채로선 도저히 풍광이 나지 않는 우리의 단출한 집과는 느낌이 다르다.

빛이 비켜서 건물에 어둠이 들어서는 순간이다. 왠지 쓸쓸하다. 스위스라면 그런 생각은 안했으리라. 스위스의 집들은 산비탈에 외따로 드문드문 서있다. 그들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놀 줄을 잘 모른다. 가라오케란 곳에 들어와 술을 한잔 시켜놓고 노래 부르며 신나하는 관광객을 보며 즐거워한다. 요들송은 산새와 같이 부른 외로움을 달래는 목동의 노래다. 사람은 원래 무리 짓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집 또한 모여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교수 사택이나 되는가보다. 연구에 몰두하기는 그럴듯해도 고즈넉한 것이 너무 차분하다 싶고 사택이라니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아옹다옹하며 살아도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맛이 집의 온전한 느낌이 아닐까. 우리의 삶에 큰 부분이 집이다. 산다하는 말엔 집이 들어있다. 집은 생의 자산으로서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자산으로는 소유도 의미하지만 마음의 안식도 의미한다. 하지만 누구든 소유 자산에 치우쳐 생각을 많이 한다.



난 계단 밟듯 차곡차곡 집을 늘려왔다. 13평에서 시작하여 17평 그리고 19평 마침내 내 집이라 하여 23평을 처음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도 차츰 늘려 28평, 37평에 지금은 43평에 산다. 늘릴 때마다 어쩌면 하는 짓이 똑같은지 모르겠다. 처음 몇 달은 전에 비해 꽤 넓다하여 이 방 저 방 몇 번이고 재고 따져보며 흐뭇해한다. 그러는 마음은 어느 새 새 평수에 젖어서는 무감해지고 당연하듯 잊어버린다. 이렇듯 소유의 개념은 지속적이지도 않고 상실감을 쉽게 낳는 것이 아닐까.

정작 흡족함은 월세에서 전세로 갈 때라 던지 넓혀서 이사를 간다할 때 그 방 쓰임을 마음속에 그려볼 때 더하였다. 소망이 현실이 된다는 기대는 따스한 봄볕 맞듯 달고 기다림을 앞세운다. 그러한 때 다가서는 집은 포근한 마음의 안식이다. 소망이 있으며 꿈과 기다림이 숨 쉬는 집이다. 정작 얻어내고서는 기쁜 느낌을 오래 간직하지 못했다. 소유처럼 무서운 의미의 것도 없다. 소유에 집착하여 얻을 때는 잠시이고 잃을 땐 상실감은 말할 것도 없고 다시 마음의 평정을 찾기도 어렵다.

소유는 자산에 불과하지만 열린 마음은 자산이며 또한 행복이란 생각이다. 행복은 가까이 있다하더니 이웃하여 산 사람들이 멀리 사는 친척보다 친근하게 지내기가 훨씬 쉽다. 집은 같이 더불어 산다는 것을 포함한다. 한 터울에 동질화 되고 같이 보고 느끼는 풍경들이다. 동질의 통속이나 종속이 낳은 정감은 살아보니 작은 평에서 어우러져 살 때가 짙었다. 첫 살림때 나누어 먹었던 찐 감자는 지금도 여전히 좋은 기억의 창에 담겨 있다.

내 경우 잊지 못할 것이 첫 살림 때 1층에 산 아저씨이다. 그는 엿을 팔고 남으면 매번 통로에 날라다 주었는데 우린 신문이고 병을 모아 주었었다. 어느 때는 일손을 돕겠다고 병을 담고 폐지를 모으러 다니기도 하였는데 전혀 부끄럽지가 않았다. 첫아이를 맡기고 놀러 갔던 것도 그 이웃덕분이다. 집을 넓혀서는 괜한 자존만 늘고 정은 시들해졌다. 요즘 집 이야기하면 정담어린 이야기는 없고 가스 값에 전기 값 이야기가 고작이고 집값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런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서울사람들 사는 집 이야기이다. 어디 사느냐가 그렇게 큰 차이의 경제개념인지 미처 몰랐지만 개발을 시작 할 때 2억이던 것이 개발이 끝날 쯤에 이르러 9억이 되었다니 그것부터 이해가 안 된다.

그 정도의 가치라면 얼른 팔아 공기 시원치 않고 사건사고도 많은 곳을 떠나는 것을 맨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싶은데 또 그렇지가 않다. 혹여 기다리면 20억이 된다는 소유의 미련 때문은 아닐까. 그 비좁은 곳에 몰려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든 세상이 제대로 뜻을 이룰 것이면 시간과 깊이가 필요하단 생각을 하는데 이 또한 그러한 문제는 아닐까 모르겠다. 우리는 찾아온 행복을 스스로 버리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무튼 난 다시 평수를 줄여 그 시절의 애틋함으로 돌아갔으면 한다. 시간과 깊이가 물들어 솔 향같은 그윽한 정감이 살아 숨쉬는 그러한 집. 나로선 집은 마음의 안식처이면 그만이다 싶다.


출처 : 50-70대의사랑과 추억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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