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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유앤미나 2008. 3. 20. 18:36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김 일병 사건으로
이 나라는 지금 초상집이 되어 있다.
설령 그의 가족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해도
이 일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는 누구란 말인가.
지금까지 언론에서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으로,
매보다 욕을 더 싫어하는 문화충돌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원인들을 분석하고 있지만,
나는 그것과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그 사건을 바라보게 되었는데 그 계기란
‘사랑이라는 두 글자’라는 그의 글 때문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힘이 든다.
어느 한 순간에 쓰러져 버린 채 잠이 들곤 한다.
사랑이란 두 글자 때문에
이젠 나 자신조차 사랑하기 두렵다.’
물론 이 글은 헤어진 애인을 그리워하며
쓴 것이 분명하지만 모든 사람은
본능적으로 사랑을 주고 받고자하는 욕구가 있는데,
그 사랑이 채워지지 않을 땐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이번처럼 터지는 것이다.
나는 이 사건을 바라보면서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책이 문득 떠올랐다.

한 천사가 어떤 여인을 살려 준 이유로
자신은 하늘에서 추방되었지만
세 문제를 풀면 다시 하늘로 갈 수 있었다.
천사는 땅에 떨어졌지만 어느 부부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살아나면서 ‘인간의 가슴에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첫 번째 문제의 답을 금방 알았다.
어느 날 거만한 사내가 구둣방에 찾아왔을 때
등 뒤에서 이미 죽음의 사자가 미소 짓고 있는 것을 보고서
‘인간에게 없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두 번째
문제의 답을 또 알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어떤 중년 부인이
쌍둥이를 데려왔는데 죽은 과부의 딸이 분명했다.
그는 여인의 사랑 속에서 훌륭하게 자란 그들을 보고서,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답을 찾았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누구나 한번쯤은 해 보았을 질문인데
톨스토이는 그 책에서 ‘사랑’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물질의 풍요(豊饒)와
편리(便利)한 과학문명 속에서
사회가 아무리 다원(多元)화 되어 간다 해도
사람은 사랑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김 일병처럼 군중 속에서도 소외를 느끼며 끝내는
사회(社會)의 시한폭탄이 되 버리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지적했던 그 사랑으로
살지 못할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그의 취미는 게임이었듯이,
가상을 현실로 착각하듯 범행을 저질렀다.
현대인은 온라인에서의 인간관계에 익숙하다보니
오프라인에서의 갈등 해결 능력이 자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문가의 지적대로,
컴퓨터를 하다가 잘 안 되면 한순간에
갈등 상황을 해소할 수 있는 리셋(Reset)이나
로그오프(Log-off)와 같은 온라인식 해결 방법을 찾다보니,
어떤 문제가 생길 때 참고 기다리며 해결해야 하는
전통적인 ‘사랑’이라는 방식들이
낮 설어지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터지면 순간
정신이 나간 딴 사람이 되면서
가상 속의 일들을 현실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여자친구가 궁금해 탈영했다."
“군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기에 탈영했다.”
이것이 진정 탈영하는 원인들이 될 수 있는가.
사랑은 지금 당장에는 기쁨이 되지 못하나
내일을 위해 고통(苦痛)이라는 현실 속에서도
한(恨)을 삭히며 그 날을 기다리게 한다.
모든 미움과 다툼들은
외적으론 그럴듯한 원인들이 다 있지만,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에 생긴 일이다.
사랑은 비겁하게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어떠한 갈등 속에서도 해결하는 능력이 있기에
사랑은 신비(神秘)롭다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로 사랑이 없으면 잔인한 사람이 되어간다.
친구가 막사 안에 있는 줄 알면서도 수류탄을 던졌고,
소대장과 신음하는 취사병에게 확인사살을 한 후에
다시 태연스럽게 근무지로 돌아갔다는 것은
평소 감수성이 예민하고 소심했던 그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과연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사람은 한 번 사랑에 굶주리게 되면
상상할 수 없는 행동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살인마 유영철은 세 사람을 죽인 이후부터는 가슴에 그
어떤 갈등도 느낀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사자의 입보다 사람의 가슴이
더 무섭다는 격언(格言)이
요즘 들어 더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은
심령에 화인(火印) 맞은 사람들의 모습들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너무 많이 보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만약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에게
비수를 꽂은 사람들을 그 때마다 복수했다면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겠는가.
그러한 인생의 위기 때마다 우리는
생존(生存)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분노들을
쓸어안고 아니 오히려 자책(自責)하며
다른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자존심의 꼬리를
소리 없이 내릴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렇게 비겁하게만 느껴졌던 그 모습들조차도
사실은 어느 순간에 그의 사랑이 무딘
가슴에 파도치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용서하며
살아왔던 일들이 이제는 부끄럽게 느껴지지가 않고
오히려 그 분의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걸
보니 이제 나도 도인(道人)이 된 모양이다.
물론 그 사랑이
나를 바보로 만들 때도 많지만,
그런 일보다는 그의 생명(生命)이 더 크게 요동침을
느끼기에 또 한 번 눈물지으며 감격해 한다.

마지막으로 가슴에 사랑이 가뭄 들 때,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갖지 못한다.
'다음 휴가는!?'라는 그의 글을 보면
제목과는 달리 내용은 역시나 절망적이었다.
‘...휘청거리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이 술을 다 마셔버리면 잊혀질려니 하고 무작정 마셨다.
......
너는 없고 내 가슴에선 피가 난다.
너무나 쓰리고 가슴 아프다.’
그에게 유일한 소망은 휴가였건만
그 다음 휴가조차도 감정 표현은 슬픔이라고
써 놓은 것을 보면 분명 내일에 대한 그
어떠한 소망도 갖질 못한 모양이다.
인생은 사랑으로 살아 갈 때
내일(來日)에 대한 소망을 갖는 법인데,
그 미래가 없는데 현재를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는가.
자아(自我)라는 왕국에서는 순간에 만족하면 되기에
꿈이나 소망이란 단어를 잊은 지 오래 되어서
꿈을 위한 어떤 고통도 견디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세상에서는
가장 무서운 사람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주었던 것이다.

주여,
새삼스럽지만
사랑은 그 어떤 은사(恩賜)보다
귀하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당신이 있고,
미움이 있는 곳에
제 자신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젠 판도라의 상자에
남은 것은
당신을 향한 희망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오늘을 극복하게 하시고,
온유한 마음을 갖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신이 주셨던 그 비전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2005년 6월 26일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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