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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는 삶

유앤미나 2016. 3. 22. 18:45
비우는 삶 나는 2년 주기로 사무실을 대대적으로 정리(整理)한다. 3평 남짓한 작은 공간엔 다양한 책과 수천 건의 자료화일, 기타 집기류 등으로 만물상(萬物相)같이 복잡하다.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무조건 버린다는 원칙을 세운 뒤 정리하면서 놀란 일은 이전에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이젠 쓰레기밖에 되지 않음을 깨닫고, 나는 왜 여태껏 이 쓰레기들을 안고 살았던가하는 아쉬움 속에 정리하지만, 치워진 빈 공간만큼 내 마음은 넓어져만 간다. 얼마 전 부자 소리를 듣는 지인이 새 집을 짓고서 초대하여 간 적이 있었는데, 너무도 단순한 집 구조에 나는 적잖은 충격(衝擊)을 받았다. 그는 상식적으로 당연히 있어야 할 것 같은 가구들조차 거의 다 없애버리고 최소한 필요한 도구만 들여놓고서 단순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더 놀라운 일은 부의 상징처럼 여겼던 고급승용차까지 다 처분(處分)한 후 이동 수단으로 사용되는 작은 차 한 대만이 큰 차고를 지키고 있었는데, 왠지 그가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멋지게 보일 수가 없었다. 이전에 방송인 남희석 씨의 소박한 집을 보고 시청자들이 감동(感動)을 먹었듯이, 요즘에는 소유를 통한 부러움보다는 버림과 포기(抛棄)를 통한 감화력이 더 큰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버림과 포기는 분명 두 음절밖에 되지 않지만, 실제 그렇게 실천하기란 왜 그리 어려운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진정한 행복이란 버림과 포기를 통해 온다는 소중한 인생의 진리는 우여 곡절한 삶을 통해서만 알 수 있기에, 행복(幸福)지수가 높은 사람이 많지 않은 모양이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행복의 원리가 자신에게 무슨 유익을 주겠는가. 리프킨은 ‘소유의 종말’에서 소유와 상품화를 통했던 자본주의가 지나가고 이제 접속(接續)으로 통하는 바이오테크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오래 전에 선언했다. 그는 사람들이 항구적인 소유의 개념에서 벗어나 접속을 통해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권리 자체에 만족(滿足)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접속의 반대는 소유다. 산업 시대에서는 소유를 통해 자기영역을 확대해 나갔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21C에서 혁신을 원한다면 소유(所有)는 부담스럽기만 하다. 사람은 나이에 따라 만족하는 척도(尺度)가 다르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알고자 하는 탐구욕에서 시작하다가, 조금 인생을 알 때부턴 소유욕(所有慾)에 빠져 목숨 걸고 모으려고만 하다가, 어느 때 부터인가 모아놓은 모든 것을 갖고 정치욕와 명예욕에 마지막 올인을 한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 하늘을 보며 인생의 본질(本質)은 소유에 있지 않고 버리는 데 있음을 깨닫고 하루아침에 생의 목적이 달라진다. 은에서 찌꺼기를 제해야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오듯, 어린아이 같은 황금, 젊은이 같은 인간관계 그리고 노년 같은 이기적 야망을 버려야만 쓸 만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안 후 부터, 인생이 진지해 지면서 조금씩 버리는 연습(練習)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람 앞에서나 신 앞에서나 진정한 도(道)란 버리는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스칼렛이 이런 말을 한다. ‘내일(來日)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진정한 내일을 위해 오늘은 더욱 단순(單純)한 삶을 살라는 메시지로 나는 받아들였던 것이다. ‘인생은 별거 아니야’라는 광고카피처럼 우리네 삶은 끊임없이 버리는 데 있지 모으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광야의 수많은 우상(偶像)들을 버려야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석 달 동안 생활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집에 쌓아두는 실험을 담은 캐나다 다큐가 있었다. 캐나다 한 가정에서 쓰레기가 얼마나 버려지나 알아보려고, 세 달 동안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창고에 모으면서 일어나는 해프닝들이었다. 아무리 좋은 집에 살아도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모아놓기만 한다면 지옥(地獄)이 따로 없듯이, 삶 속에서 마음의 쓰레기, 인생의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면 결단코 행복(幸福)한 삶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행복은 거창한 일이 아니다. 집에서 쓰레기를 당연히 버려야 하듯이, 인생의 쓰레기들도 날마다 버려야만 한다. 물론 사람마다 쓰레기에 대한 의미는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단순한 삶을 방해(妨害)하는 모든 것이 인생의 쓰레기라는 점이다. 인생의 본질이란 이렇듯 소유(所有)에 있지 않고 버리는데 있음을 아는 사람은 묶이지 않는 단순한 삶이 가능하다. 버린 만큼 생의 자유와 평안이 있음을 경험하기에 그는 버림의 다음 단계인 ‘포기’(抛棄)에 이르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소유에 대한 강한 본능을 갖고 태어난다. 목표달성을 위해 끊임없이 채찍질하면서도 안되면 자학(自虐)하느라 도무지 한 잔의 차 마실 여유도 없이 다람쥐처럼 무언 간에 쫓기며 살다가, 어느 순간 어떤 계기로 자신의 방어기재가 깨지면서 ‘버림’과 동시에 ‘포기’라는 친구를 만나면서 참된 평안(平安)을 누리게 된다. 포기는 단순한 삶의 궁극적 목적을 이루게 하는 첩경(捷徑)이다. 그것은 자아(自我)를 내려놓고 타인을 얻고, 물질의 줄을 내려놓고 영혼(靈魂)을 얻게 되는 생의 위대한 기회다. 어느 날 선데이스쿨 일일교사가 아이들에게 장난하듯 질문(質問)했다. ‘애들아, 내가 집과 자동차를 팔아 교회에 바치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아뇨!’ ‘그럼 날마다 거리 청소를 하면 어떨까?’ ‘아뇨!’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면 안 되니?’ ‘그래도 안돼요!’ ‘도대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나도 너희들처럼 천국에 갈 수 있단 말이니!’ 그 때 제일 앞에 있던 아이가 소리쳤다. ‘죽어야 가요!’ 너무나 당연한 말임에도, 우리는 이 기본적인 진리(眞理)를 무시하고 살아가기에 분쟁은 끊이지 않고 행복지수가 낮은 것이다. 세상은 내 생각대로 안 되는 것이 정상적인 일이다. 이런 세상에서 내가 행복하게 사는 길은 죽음과 같은 ‘포기’(抛棄)밖에 없다. 신은 인생들을 포기하고 또 포기하게 하다가, 목숨까지도 포기할 때쯤에 가서 우리에게 죽음을 통보(通報)한다. 이런 과정을 무시하고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예고(豫告)한다면, 사람들은 너무 당혹스러워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반지의 제왕’은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극렬히 싸우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철옹(鐵甕)성 같은 자아중심적 가치관을 포기하고, 사랑이라는 탈자아중심적 가치관을 간직하고자 그 글을 쓰지 않았겠는가. 신은 포기를 통해 끊임없이 인간들에게 무언가를 지금 이 순간에도 주지(主旨)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엔 자기계발(自己啓發)을 위한 수많은 책들이 있는데, 버림과 포기의 미학이라는 공통점이 내포되고 있음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단순히 포기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전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포기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더 큰 어려움에 빠지는 것을 막아줌과 동시에 생각지 않는 새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우리가 버림을 통해 단순한 삶을 살아가다가, 포기를 통해 성화(聖化)적 삶을 살아가는 궁극적 목적은 사실은 인생의 사명(使命)을 감당하기 위함이다. 천양희 씨의 ‘상실’ 이라는 시(詩)는 인생의 사명을 되새겨 보게 하는 좋은 교과서다. ‘존재를 잃어버리면 가슴을 잃는 것이요, 가슴을 잃어버리면 자신을 잃는 것이요, 자신을 잃어버리면 세상을 잃는 것이다...’ 자신이란 곧 자기를 향한 신의 사명(使命)이다. 그 사명을 잃어버리면 인생(人生)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내 자아는 날마다 포기해야 할 일이지만, 사명은 포기하는 순간 세상에서 자신이 존재해야할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피곤한 삶, 공허한 삶, 서글픈 삶의 공통점은 사명(使命)을 벗어난 삶을 살기 때문이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 칼메닝거는 수없이 찾아오는 우울증 환자들에게 의외의 처방(處方)을 내린다. ‘당신이 우울증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무조건 집을 나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자를 도우라.’ 그의 지론은 자신에게 몰입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집중(集中)하다보면, 우울증은 자신도 모르게 치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 옛날 바울이 마게도니아로 갔던 그 배가 유럽의 운명(運命)을 바꾸어 놓았듯이, 진정한 사명은 소유에 묶이지 않고 더욱이 추억에 갇히지도 않고 신이 기뻐하는 일, 이웃을 세워주는 일에 매진하도록 단순한 삶을 가능케 한다. 인생은 지름길도 없다. 인생은 아무리 치밀하게 준비한다 해도 홀로 갈수 없는 여정(旅程)이다. 끝까지 부끄러움 없이 완주하려면 인생의 멘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일이 나의 사명이요, 그가 가장 기뻐하는 일이다. 그 일을 위(爲)해 우리는 비움과 포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주여, 인생은 소유에 있지 않고 비우는데 있다면서 저는 아직도 모으려고만 합니다. 인생은 포기에 있다고 말 하면서도 아직도 자존심의 칼을 세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비움과 포기란 생의 사명(使命)을 감당키 위한 과정이라고 하면서도, 그릇된 목적을 사명처럼 여기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으로 충만(充滿)하게 해달라고 하기 전, 겸손히 자신을 비우는 기도가 먼저 있게 하소서. 2009년 8월 2일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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