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는다는 것 / 황 필 호
나이가 들수록 늙음을 새삼스레 체감할 때가 많다. 어느 날 갑자기 신문의 글씨가 희미하게 보일 때, 상대방의 질문을 잘못 듣고 전혀 딴 얘기를 하여 지적을 받을 때, 잇몸에 음식이 유난히 많이 낀다고 느낄 때, 과음을 한 다음 날 아침에 손이 부들부들 떨릴 때, 그리고 한 말을 몇 번씩 다시 한다고 아내로부터 핀잔을 받을 때.
그러나 어느 경우에는 본인은 별로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상대방으로부터 늙은이의 대접을 받아서 자신이 노인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느낄 수도 있었다. 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승객으로부터 지하철 자리를 양보받았을 때, 혹은 훌쩍 자란 조카를 쳐다보았을 때가 이런 경우에 속한다.
나는 며칠 전 어느 제자의 편지를 받았다.
선생님, 격식을 차린 인사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제가 학위를 받고 버젓이 어느 지방 대학에 전임이라도 되면 그때 선생님을 찾아 뵙고 “시골에서 몇 년 동안 보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릴 때를 기다렸습니다. 워낙 인문학 공부란 것이 진전이 더딘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간의 공부가 눈에 띄게 성과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저 우여곡절 끝에 오는 학기에 학위 논문을 제출할 채비가 겨우 되었을 뿐입니다.
나는 여기까지 읽으면서도 그의 편지가 그저 안부 편지려니 했다. 그러나 그 편지의 다음 부분은 완전히 나의 늙음을 실감케 했다.
선생님, 지난번에 우연히 전철역 근처에서 선생님의 모습을 알아차린 것은 모두 선생님의 제자였던 우리 일행 중에서 제가 제일 먼저였습니다. 선생님께 택시를 잡아드리기까지 불과 몇 분간이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몇 년만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선생님의 모습이 제 뇌리에 지금까지 맴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구정 전날에는 식구들을 데리고 명절을 쇠러 가는 길에 선생님께 인사라도 드릴까 하여 전화를 했더니, 아드님이 전화를 받아 선생님이 친구분 댁에 가셨는데 자정쯤에야 오실 것이라 했습니다.
그날 뵌 선생님의 모습은 저에게 조그만 충격이었습니다. 이렇게 ‘충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선생님께 결례가 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저의 가슴과 뇌리에는 계속 작은 파도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선 제가 몰라뵐 정도로 하얗게 서리가 내린 선생님의 수염이 왈칵 세월의 무상함을 절감케 했습니다. 늦은 밤이어서 잘못 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부디 아직은 건재하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컷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선생님은 제가 이렇게 감상적으로 선생님의 모습을 그릴 정도로 기력이 쇠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의연한 자신감으로 천하의 사람들을 멋대로 야단치고 충고하고 희롱하던 학부 시절 선생님의 모습이 저희들의 눈에 비쳤고, 또한 그 강렬한 눈빛을 텔레비전 화면에서나마 요즘도 가끔 느끼고 있었기에 선생님의 모습은 더욱 충격이었습니다.
나는 편지를 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그는 나의 육체가 늙었다는 사실에 ‘조그만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나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늙었다는 것을 그가 발견한다면 그는 분명 커다란 충격을 받을 것 아닌가.
나는 다시 한 번 ‘몸은 늙어도 마음만은 젊게!’라는 구호를 조용히 외운다. 그러나 ‘마음은 늙어도 몸만은 젊게!’라는 구호가 없는 것을 보면, 그래서 몸과 마음이 전혀 따로따로 작용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면, 마음의 젊음이나 늙음도 몸의 젊음이나 늙음과 밀접한 관계가 없을 수 없겠다.
이렇게 보면 성서가 말하는 ‘백발의 영광’은 몸이나 마음이 젊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는 데 있지 않을까.
황필호 생활철학연구회 대표. 강남대 종교철학과 교수. 계간 『어느 철학자의 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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