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스크랩] [에세이]길들일 나름 - 안인찬

유앤미나 2012. 7. 23. 13:56
길들일 나름 - 안인찬


일 본의 이바라키 현 아미 지역의 날씨는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비슷하다고 할까. 겨울 기온으로 보면 청주보다 10℃ 이상 따뜻하였다. 아주 추운 날에나 장갑이 아쉬울 정도고, 그나마 약간만 움직이면 겉옷을 벗고 싶을 만큼 포근하였다. 문제는 집안에서의 생활인데, 문짝치레의 목조 건물 안에서 으스스한 추위를 견디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다미나 마루로 되어 있는 방바닥은 언제나 사람 덕을 보려 하였다. 외투까지 입고 버티어보려면 5월에도 양말 신은 발이 시렸다.

모 르는 사람은 보일러를 돌리면 될 것 아니냐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아미 지역에는 그런 난방시설은 없었다. 집집마다 전기온풍기를 벽에 매달아놓고 쓰는데 그것이 그렇게 만만한 놈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온풍기의 신세를 지려면 우선 전기세가 부담스러웠다. 전기세가 없다 해도 건조한 바람을 긴 시간 계속하여 맞으면 몸이 배겨낼 수도 없었다. 낮에는 그렇다 치고 밤을 지내는 것이 더욱 어려웠다.

대 책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옛날의 기억을 살려 비닐을 사다가 바깥쪽의 창문들을 모두 봉했다. 밤에는 담요로 건물 안쪽의 문까지 커튼 위에 덧가렸다. 바닥에는 전기장판을 깔고 그 위에 일본 사람들이 하듯이 고다쯔도 놓았다. 고다쯔를 덮은 담요 위에는 이불을 석 장이나 더 사다가 덮었다. 그 밑에 내외가 발을 뻗고 각자 편하도록 자세를 잡고 나면 영락없는 굴 속의 너구리 꼴이었다. 그 모양으로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눌 때는 허연 입김이 상대방의 얼굴을 가릴 정도로 진하게 뿜어 나왔다. 그야 참더라도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고다쯔를 엇비슷이 놓고 누웠는지라 둘 사이에 기둥이 버티고 있어 팔다리를 움직이기도 자유롭지 않았다. 자다가 화장실에라도 다녀올라 치면 선뜻한 냉기에 소름이 끼치고, 그 절차 또한 이만저만 번거로운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당 연간 소득이 3만 불을 넘는다는 나라에서 우리나라 60년대의 겨우살이를 복습한 셈이었다.

그 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웅크린 채 잤는데도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가뿐하다는 사실이었다. 감기가 드는 일도 없었다. 그럭저럭 지내기는 하면서도 한국 생활과 비교하여 어려운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추위라는 말이 얼른 튀어나왔다. 물가가 비싼 것이나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것쯤이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을씨년스러운 추위는 실로 감당하기에 만만치 않았다.

우 리와는 달리 이웃에 사는 일본 사람 부부는 아흔이 넘은 이들인데 전기담요조차 쓰지 않고 지냈다. 그들은 겨울에도 한낮에는 문을 있는 대로 모두 열어놓고 살았다. 벽에 붙어 있는 온풍기는 거의 장식물에 불과하였다. 노인들이 기거하는 방은 언제나 헛간처럼 썰렁하고 온기라고는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 생활이 몸에 익은 이들로서는 자기들보다 젊은 우리가 추위 타령을 하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운 듯하였다. 보기에 안쓰러웠던지 잘 때 물병에 뜨거운 물을 넣어 이불 속에 넣고 자면 따뜻하다고 자기들이 터득한 지혜를 알려주었다. 그런 말을 주고받은 지 며칠 후에는 아예 주머니 두 개를 만들어 물병까지 담아다 주면서 써보라고 하였다. 저녁마다 뜨거운 물을 갈아 넣어야 되는 것이 성가신 일이었다. 그러나 그 따끈한 맛은 성가시다는 생각을 덮어주기에 충분하였다.

아 무리 적응이 된 탓이라고 하더라도 구순을 넘긴 노인들이 어깨를 쩍 펴고 있는 앞에서 춥다고 잔뜩 웅크리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생각해 보면 일본 사람들이 추위를 잘 견디는 것은 어릴 때부터 몸을 길들여 익힌 덕택이었다. 한겨울에도 초등학생들을 반바지만 입히고 군인들처럼 행군을 시키는 것을 본 적도 있었던 것이다.

사 람의 생각이나 생활은 길들일 나름이라는 생각을 더 깊게 해준 것은 일본 사람들의 장묘 문화였다. 매장을 하지 않고 납골당을 만드는 것 자체가 우리의 전통과는 다르지만 그런 형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부모의 묘소라도 산 사람이 거처하는 주택가에서 멀리 떨어져야 하는 일종의 혐오 시설로 생각한다. 반면에 일본 사람들은 정원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나 장식물의 하나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면 그보다도 더 친근한 시설로 생각하며 주변에 설치하고 가꾸는 듯하였다. 날마다 묘소에 무엇인가 봉헌을 하면서 사는 이들도 있었다. 하루는 예쁜 꽃이, 다음 날에는 과자나 음료수가 놓여 있어 가족들의 변함없는 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나라라 안마당이나 대문 옆에 묘소를 만들어놓은 집이 허다하고, 골목 깊숙이 들어간 주택가 한가운데도 널찍한 묘지가 있었다.

지 나다 보니 아파트 마당에 납골당이 즐비하게 서 있는 곳이 있었다. 아파트와 거리를 둔 것도 아니고, 마치 장독대처럼 문을 열면 발에 채일 정도로 바싹 붙어 있었다. 이해가 될 듯하면서도 우리의 정서와는 너무나 거리가 있는지라 동행하던 교수에게 물어보았다. 저렇게 묘가 가까이 있는 아파트는 입주하기를 꺼리지 않느냐는 질문에 일부러 저런 곳을 찾아가지는 않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 답이었다. 묘지 옆이 아닌 다른 지역보다 아파트 값이 싸냐니까 그렇지도 않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대답을 직접 확실하게 들었어도 의심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아무리 일본 사람들이기로서니 공동묘지 옆에 사는 것이 꺼림칙하지 않을 리가 있을까 싶었다. 묘 앞에 서면 일단 등골이 오싹해지는 나로서는 일본 교수의 대답을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다 시 한국의 내 집 아파트로 돌아와서 제일 좋은 것은 따뜻한 것이었다. 아직 겨울인데도 양말을 신을 필요가 없고, 가벼운 옷차림으로도 어깨가 쫙 펴지니 살맛이 났다. 겨울잠을 깨고 굴 속에서 나온 동물들의 기분이 이런 것이려니 싶었다. 잠잘 때 두툼한 이불은 그만두고 홑이불마저 걷어찰 정도니 몸이 자유롭고 온풍기고 고다쯔고 뜨거운 물병 같은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챙길 필요가 없는 것도 좋았다. 그렇다고 모두가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따뜻한 방에서 늘어지게 잤음에도 불구하고 썰렁한 방에서 자고 났을 때처럼 상쾌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슬 며시 일본에서의 생활이 생각나서 베란다 쪽의 창문을 열고 자 보았다. 처음에는 2㎝ 가량 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황소바람이 들어왔다. 그로부터 차츰 창문을 더 열어 나아가 지금은 20㎝ 정도는 늘 열어놓고 지낸다. 황소바람이 드나드는 정도가 아니라 베란다의 온도와 방 안의 온도가 비슷해져 버렸다. 거실의 온도와 5℃ 이상 차가 나니까 열린 창문 옆에 맨발로 있으면 발이 시리다. 이제는 안방이 집안에서 가장 썰렁한 공간이 된 것이다. 옛날에 문 좀 열어놓고 지내라고 성화하던 가족들이 안방에 들어서려다 썰렁하다고 문을 닫고 나가기에 이르렀다. 잘 때에는 전과 달리 도톰한 이불을 덮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더운 방에서 배꼽을 내놓고 자는 것보다는 여러 가지로 이로운 듯싶다.

이래저래 사람은 길들일 나름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출처 : 50-70대의사랑과 추억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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