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워하는 인생
남녀대학생에게,
‘당신은 누구와 인생을 바꾸고
싶은가?’라고 질문을 했더니,
7위에서 2위까지는
호날두, 김태희, 김연아, 장동건,
그리고 오프라 윈프리,
빌게이츠라고 답했다.
그리고 1위는 예상을 뒤엎은 대상
‘당신’이 뽑혔다.
즉 자신의 인생은
누구와도 바꾸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의 엄청난 업적에 비해
자신은 모든 것이 빈약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끝까지 투자(投資)해 보고 싶다는 의미였다.
남을 부러워하면 진다는 말이
더 실감이 난다.
쇼펜하우어는
우리는 남을 부러워하는 데
어리석게도
인생의 4분의 3을 허비한다고 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내가 남을 부러워하는 순간
자신을 부정하므로
자기 인생은 있을 수 없게 된다.
자아가 없는 사람은
더 이상 노력도 하지 않고
주변 환경만 탓하며
부정적인 사람이 되므로 비참한 인생을
살아 갈수밖에 없다.
남을 부러워하는 것은
자기비하요
열등감에 빠지게 하므로
자신은 졸지에 타인의 인생을 사는 격이다.
겸손과 비하,
성찰과 비교,
자존감과 열등감은 분명 다르다.
그들에게 피해의식과
열등의식(劣等意識)은 보너스다.
도대체 왜 그렇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나는 나다.
나는 신의 작품으로 의당 존재목적이
있는데 왜 어리석게
내 인생을 남에게 맡긴단 말인가.
무엇이 그렇게 부러웠단 말인가.
내가 부러워하는 그 사람도
나와 전혀 다른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그도 나와 같은 분류에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어느 날부터
달라진 것 뿐이다.
그 차이(差異)가 무엇이겠는가.
그것을 발견해야 한다.
많은 차이점이 있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차이란
그들은 무슨 일이든 안 되면 될 때까지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이다.
보통 사람들이면 이미 포기하고도
남았을 것을 내가 부러워하는
그 사람들은 많은 악조건들 앞에서도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될 때까지 최선을 다했기에
사람들로부터 부러움을
받게 된 것이다.
몸부림과 수고와 고통 없이
부러운 위치에
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게으름,
나의 안이함,
순간순간 나의 잘못된 생각들이
내 자신을 힘들게 하고 제한시키고 있을 뿐이다.
내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내 결단(決斷)이 판가름한다.
똑같이 재능이 있었음에도
나는 부러워하고만 있었지 그들처럼
작은 가능성이라도 싹을 띄우고
열매 맺게 하는데
너무나 소극적으로 살았던 자신을
발견해야만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므로 진정 남을 부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려면,
첫째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동물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사고(思考)의 능력에 있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갈대처럼 약한 존재지만
생각에 따라서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결코 환경에 따라
결정되지 않고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어떤 초등학생이
밑그림을 평화로운 산을 배경으로
그렸다면 분명 새나 나무,
집, 소 농부 등을
그리지 탱크나 비행기를 그릴 리가
없다.
이미 밑그림만 봐도
무엇이 등장(登場)할지를 알 수 있다.
밑그림이란 그 사람의 내면
곧 생각을 의미한다.
생각에 따라 그림이 완성되듯
인생이 결정된다.
항해 중이던 한 척의 전함이 있었다.
선장은 안개를 뚫고 다가오는
불빛 하나를 발견한 후
빨리 진로를 변경(變更)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불빛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당신이 경로를 바꾸시오!’
선장은 화가 나 같은 메시지를 보냈는데,
똑같은 응답이 왔다.
너무 화가 난 선장은 소리치며 말했다.
‘나는 해군 대장이다. 빨리 경로를 변경하라!’
그 때 불빛으로부터 다시 답장이 왔다.
‘여기는 등대입니다!’
우리는 그 선장처럼
자신이 등대로 착각하는지
자신은 진리이므로 상대가 바꾸라고 명령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누구누구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산다고 불평을 한다.
하지만 인생에서 정답은
하나가 아니다.
자신만 갖고는 안 된다.
언제나 겸손하게
부정적인 생각에서 긍정적인 생각으로,
닫힌 생각에서 열린 생각으로,
이기적 생각에서 이타적인 생각으로,
거짓된 생각에서 진실한 생각으로,
땅의 생각에서 하늘의 생각으로
바꾸어야만
무사히 목적지에 갈 수가 있다.
둘째는 습관(習慣)을 바꾸어야
부러워하는 인생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은 습관을
습관은 성격을 성격은 인격을
인격은 운명을 운명은 인생을 바꾼다.
생각의 도식에서 습관의 변화(變化)는
거의 결정적인 과정이다.
습관은 제2의 천성으로
3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습관(習慣)은
내 인생에서 처음에는 방문이지만,
다음에는 단골이요,
결국 주인이 된다는 말처럼
내 인생을 좌우하는
가장 무서운 핵심(核心)요소가 되고 있다.
우리가 평소 소홀히 여겨왔던
습관의 위력은
이렇듯 작지만 치명적(致命的)이다.
모든 사람들의 행동 대부분은
사실 습관에 영향을 받고
그 습관 속에서
재능(才能)이 조금씩 길러졌을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부러워할 정도로
성공한 사람과 나와의 차이란
다른 점이 아니라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의 차이에 있었다.
사람마다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을 동시에 가지고 있지만,
문제는 자신의 나쁜 습관은
상대가 금방 알아 차리므로 인생에서
마이너스 요소가 되게 한다.
욕 하는 사람,
지각하는 사람,
게으르고 불성실한 사람 등등
나쁜 습관이 몸에 밴 사람은 공공의 적이
되어 어딜 가나 기피대상이 되므로
유유상종이라고 결국
그런 사람끼리만 모여드니
근본적으로 밝은 미래(未來)가 올 리가 없다.
문제는 좋은 습관을 만드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나쁜 습관은
노력하지 않아도 너무나 쉽게
몸의 일부가 되어버리므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작은 듯 보이는
좋은 습관 하나가
성공으로 이끌어주고,
사소해만 보이지만 나쁜 습관 몇 개가
실패의 늪으로 인도해주기에
좋은 습관이 몸에 배도록
노력해야한다.
진정한 인생의 참맛은
나쁜 습관을 하나하나 지워가면서
좋은 습관을 내 것으로
하나하나 만들어 가면서 변화되어가는
모습을 이웃이 알아갈 때
나타난다.
셋째는 성품(性品) 변화가
남이 부러워하는 인생이 되게 한다.
어느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여
어느 정도 성장하여
일꾼을 세워야하는데 고민이 되었다.
교회에서 일하는 제직이라
의당 믿음이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믿음이 있다는 사람에겐
성품이 별로였고,
또 성품이 좋은 사람은 아직 믿음이
어린아이 같다는 것이었다.
그는 나이 많은 선배목사에게
이 문제를 상담하자
이렇게 답하더라는 것이다.
‘믿음은 시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지만,
성품은 평생 바뀌지 않으므로
차라리 믿음이 조금 부족해도 성품 좋은
사람을 뽑는 것이 교회에 덕이
될 것이요’
물론 믿음과 성품도 좋은 사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천성적인 성품변화란
그런 사람 만나는 일보다 더 어렵고 힘들다.
시간이 지나 달라졌는가 싶다가도
한계에 부딛치면 본래
자신의 기질과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
인생이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성품변화는 평생 과제다.
세상에는 나보다
머리와 기술, 환경이 좋은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 자체만 갖고
부러워하지 않는다.
나중에 보면
외적으론 조금 부족해도
인간성 좋은 사람,
성품이 좋은 사람을 부러워하고
같이 차를 마시며
인생을 나누고 싶어한다.
하지만 인간성 변화는 거의 불가능하다.
오히려 가치 변화에 중점을 두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사람이 변한다.
내 인생의 가치를
자신을 벗어나 이웃과 그 나라에 두면서
영혼을 섬기다보면,
인내가 생겨나고 온유함이 나타난다.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다보면
영혼(靈魂)이 건강해진다.
이렇듯
새로운 비전을 붙들고 살다보면
사람이 바뀌고
이웃이 바뀌게 된다.
주여,
행복한 인생을 위해
많은 것이
필요치 않음에도 저는 아직도
외적인 환경을 보고
마음을 뺏길 때가 있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주신
소명,
그 안에 모든 가치와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그럴듯한 이유를
주면서 저를
초조(焦燥)하게 만듭니다.
날마다
생각을 바꾸고
습관을 바꾸고
가치를 바꾸어
주신 사명 감당케 하소서.
2010년 11월 첫 날에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
사진허락작가ꁾ이요셉님, 갈릴리마을(우기자님), 포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