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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없는 사람

유앤미나 2009. 10. 20. 18:44




흠 없는 사람


국회는 본회의를 열고
정운찬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두 번째 총리가 되었지만
청문회를 통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示唆)해 주었다.

분명 인사청문회는 공직후보자들의
업무수행 능력이나
도덕성을 검증하는 제도인데,
어찌된 셈인지
그들의 비리(非理)만 드러나고 있단 말인가.

위장전입은 기본이고
투기와 병역기피 그리고 세금포탈은
모든 후보자들이 능력껏
행사하다가 청문회 앞에 선 것이다.

청문회 이후 국민들은
지도층에 대해 분노를 넘어
또 한 번의 괴리(乖離)감과 함께
냉소를 보내는 지경이다.
이제 누구도 믿을 수 없고
기대(期待)하지도 못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죽하면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가
인준 표결을 앞두고
‘흠(欠) 없는 지도자는 없다’며 야당에
협조를 구하지 않았던가.

사실 정 총리는 이전에
민주당 대선후보로 영입하려 했던 사람이요,
지역으론 선진당에 소속되어 있기에
여당에서는 통합과 중도실용 상징으로
그를 지명했는데,
산 넘어 산(山)이라고
드러난 비리들도 문제였겠지만,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정치적 실리(實利)로 인해
인준 거부에 공조했던 야당 때문에
혼이 났었다.





나는 청문회를 보면서,
학자인 저 양반도
저리도 많은 흠이 드러나는데
다른 사람은 얼마나 많은 약점(弱點)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과연 청문회 앞에 양심적으로
깨끗하고 도덕적(道德的)인 사람이
몇 이나 있을까싶다.

설령 있다면
그는 과연 유능(有能)한 사람일까 하는
의구심이 또 생겨난다.


이상하게도
흠이 없는 사람은 능력(能力)이 부족하고,
또 능력이 있는 사람은
흠이 많다.

신은 인간에게 교만(驕慢)하지 못하도록
정직과 능력이라는
두 날개를 한꺼번에 주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만일 기업의 CEO라면
흠은 없지만
무능력한 사람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흠은 있지만
능력(能力) 있는 사람을 택할 것인가.





그 뻔한 답 때문에
대통령은 무리수가 있음에도
그를 끝까지
붙잡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를 포기(抛棄)하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아야 능력이 있으면서
흠 없는 사람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흠은 있지만 같이 일하기에
적합(適合)한 사람을 찾는 편이 훨씬
지혜로운 방법이었을 것이다.

물론 흠도 없고
능력도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을 찾기란
신대륙(新大陸)보다 찾기 어려울 것이다.

차라리 모든 인간은
흠이 있음을 처음부터 인정(認定)하고
흠은 있지만 그 외에 다른
어떤 것을 보고
사람을 고르는 편이 빠를지 모르겠다.


어떤 분이 자신을 잘 아는 친구가
어느 날 이런 메시지를 보내 왔다고 한다.

‘흠 없는 사람 되려고 애쓰지 마라!’

완벽주의에 가까운 그에게
친구는 그렇게 흠 없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말고,
차라리 조금 흠이 있다 해도
사람냄새 나는 편이 더 낫지 않느냐고
메일을 보냈던 것이다.

비록 흠투성이인 자신이지만
사람냄새가 나는 사람,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첫째로 자신(自身)을 보는 사람이다.

큰 회사 중역으로 승진한
어떤 젊은이가 당시
한참 인기 있는 어떤 여배우와
만나면서 마침내 결혼(結婚)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직도 무엇이 미더웠던지
자신을 숨긴 채 제 삼자(三者)를 통해
여배우 뒷조사를 의뢰했다.

마침내 그는 흥신소로부터
그녀에 대한 보고서(報告書)를 받았다.

‘그 여배우는 평판(評判)이 아주 좋습니다.
과거도 깨끗하고,
지금도 주변에서 칭찬이 자자합니다.
그런데 최근 몇 달 동안 평판이 좋지 않은
어떤 회사 젊은 중역과 만나는 일이
조금 염려될 뿐입니다.’


사람들은 남의 허물은 그리도 잘 보면서
어찌하여 자신의 허물은
이렇게나 볼 수 없단 말인가.

원래 신은 모든 인간에게
태어날 때 두 개의 주머니를 주면서
하나는 자기 허물을 다른 하나는
남의 허물을 넣고 자신을
살펴보도록 했는데,

잘못해서 좌우(左右)로 걸라고 한 주머니를
남의 허물주머니를 앞에 두고
자신 허물주머니는 뒤로 가게 해
밤낮 남의 허물만 보고
말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여자의 비밀은
3일을 못 간다고 했듯이,
인간은 남의 허물을 보고선 그냥 있질 못하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지만,
남의 허물에 대해 아무리 말해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니 상대의 결점이 드러난다고
자신이 의(義)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남의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자신도 말한 사람과 같이
닮아가고 급기야
자신의 허물이 드러날 때는
흉봤던 말들이 부메랑이 되어 한 순간(瞬間)에
자신을 파괴할 것이다.

거울 앞에서 내가 웃으면
거울 속의 자신도 웃지만,
거울 앞에서 내가 찡그리면
거울 속의 자신도 찡그리듯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 인생(人生)이다.


그러기에
남을 보기 전에 자신(自身)을 봐야 한다.
남의 허물을 볼 때마다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자신을 바로 볼 줄 알아야
남을 불쌍히 여길 줄 알고
자신도 불쌍히 여김을 받고
자신을 고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흠 없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인간관계는 깨지기 쉬운 유리와 같고
시들기 쉬운 꽃과 같아서
조금이라도 조심(操心)하지 않으면
어떤 사이라도 금방 돌아
설 수 있다.

그러므로
서로 불쌍히 여기고
서로 용납(容納)하지 않고는
하루라도 설 수 없는 것이 인간사회다.


사람은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다.
의인도 넘어지고
원수(怨讐)도 넘어질 수 있다.

남이 넘어질 때 불쌍히 여기는 사람과
비난(非難)하는 사람의 인생은
극과 극이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인생을 안다면
인간은 불쌍한 존재(存在)임을 알고
긍휼히 대할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철학의 결론은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복(福)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왜 복(福)인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다.

신은 긍휼히 여기는 자를
긍휼(矜恤)히 여긴다고 했으므로 먼저
신에게 불쌍히 여김을 받으니
영혼의 평안함을 누릴 수 있고,

아울러 내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 자신이 넘어질 때
불쌍히 여김을 받으므로
정신적인 평안함을 누릴 수가 있고,

개인적으론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
심성(心性)이 살아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연약한 인간에겐
용서(容恕)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기에 최소한
사람을 불쌍히 여길 줄 알아야만,

기쁠 때는 함께 웃을 줄 알고
슬플 때는 같이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노후(老後)와 죽음이
두렵지 않는 사람이 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불쌍히 여기 줄 아는 훈련(訓練)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셋째는 흠 없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사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검은 대륙의 성자라 불리는
슈바이처 박사는
20대에 이미 두 개의 박사학위를
받아 교수로 생활하던 중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참상(慘狀)을 안 후,

6년 간 의학공부를 더 한 후
파이프 오르간과 안정적인 교수직
그리고 풍요로운 생활을 포기(抛棄)한 채
무작정 아프리카로 떠났다.

슈바이처는 자신이 누리는
환경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빚진 자의 심정처럼 늘 부담스럽게
여겨 홀로 떠났던 것이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자유(自由) 할 수 있다.
로마시대에는 빚을 못 갚으면
자식까지 노예가 되었다.

내 시간, 마음, 지식, 건강, 생명까지
자신의 빚을 위해
전부(全部) 바쳐야만 한다.

적금을 위해 일한다면 보상(補償)을 생각해서
일을 해도 신이 나지만,
빚을 갚기 위해 일을 할 때는
피곤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슈바이처가 말했던 빚은
누구에게 채무(債務)를 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에게 받은 사랑의 빚을 말한다.

이 작은 마음의 차이가
오늘도 천국(天國)과 지옥을 만들고 있다.





신을 믿지 않는다 해도
사람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로부터
많은 빚을 지며 살아가고 있다.

오늘 내가 존재(存在)하는 것은
부모와 형제,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섬김이 있었기에 가능했지,
내가 잘나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대한 사람이나
성공(成功)했다는 사람들의 한결같이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살아갔기에
존귀함을 얻어 형통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빚진 자의 심정이 아닌
채권자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교만(驕慢)한 사람은
적반하장 격으로
다른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 때문에
살아간다고 생각하기에,

언제나 굳어있고
무감각(無感覺)하게 살아가기에
친구도 없고
여유도 없고
재미도 없이 살아갈 뿐이다.





아직도 나에게
목숨이 붙어있다는 것은
개인적(個人的)으로 할 일이 남아있어서가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빚진 자의 마음을 갖고
죽음 앞에 넉넉한 사람이 되도록
겸손하게 살라는
신의 은총(恩寵)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은
조금 흠이 있어도
조금 능력이 부족(不足)해도
어딜 가나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행복(幸福)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상대를 섬길 때 그가
기뻐하므로 내가 기뻐하는 것이다.

모든 빚은 갚아야 자유 하지만
사랑의 빚은 갚을수록
겸손(謙遜)과 감사(感謝)라는
열매를 맺으므로

더 큰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여
그 길만이 내가 받았던
사랑의 빚을 갚는 최선의 길이다.





주여,

저는 흠은 많지만
능력은 별로
없는 연약(軟弱)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이 못난 저를 부르신
당신의 뜻을

이제
조금씩
아주 조금씩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하기에
날마다
자신을 바로 알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길 줄 알고,
어떤 일이든지
빚진 자처럼 겸손하게
감사(感謝)한 마음으로 행하게 하소서.

2009년 10월 19일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


사진허락작가ꁾlovenphoto님 투가리님 갈릴리마을(우기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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