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간 친구
나보다 세 살 많은 같은 지역 동료가
지난주에 취장 암으로 말없이 세상을 떠났다.
세 자녀와 부인은 어떻게 살라고 먼저
가는지 그에게 따지고 싶었다.
석가가 어느 날 성문으로 나가
동문에서 노인(老人)을 남문에서 병자(病者)를,
그리고 서문에서 죽은 사람(死者)과
북문에서 수행자(修行者)를 만나면서
출가를 결심했다고 하듯이,
나도 요즘에 들어서야 생노병사(生老病死)를 왜
인생사고(人生四苦)라고 했는지 피부로
느끼며 순간순간 실감하고 있다.
사람은 태어나는 일조차도 어렵지만,
목숨을 유지하고 사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그러나 죽는 일은 그런 일들과는 비할 수가 없다.
어찌 보면 인생은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눈먼 소경이 생명(生命)이라는
등불을 지키고 있다가,
예고 없는 불어오는 바람 앞에
아무 말도 못하고 사라지는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삶이 아무리 고통(苦痛)스럽다 할지라도
스스로 먼저 죽으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죽음이란 단 1초라도 지체하지 않고
시간이 되면 나를 알아보고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에서 죽음만큼
확실한 것도 없건만 어리석은 인간들은
다른 일에는 열정(熱情)을 다하면서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 일에 대해서는 가장 관심이
적다는 것은 학문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곧 천문학이나 물리, 화학 등
과학은 중세 이전부터 연구 발전되어 왔지만,
인간의 본질을 다루는 사회학이나 심리학 등은
19세기에 들어서야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것조차도 현대적인 인간론은 이전과는 다르게
인간이 중심이 되어 신-인 관계를 따지고
있으므로 죄(罪)나 죽음(死)이라는
근본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피하고 있는셈이다.
현대문화(現代文化) 자체가 이렇게
인간중심이 되다보니 도무지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여유가 없다.
그렇게 철없이 살다가...
이웃이나 가족 중에 아니 본인에게
예고 없는 하늘에서 출석통지서를 받고서야
잿빛 얼굴이 되어 한숨을 내쉰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 한다 해도
아무리 편리(便利)한 세상이 온다 해도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신과 인간의 섭리일 뿐이다.
그렇다면,
히딩크 마법으로도
과학이나 진화되어가는 학문으로도
풀 수 없는 이 죽음의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평소에 대비해야만 여유 있고 고상하게 마지막
그 순간(瞬間)을 맞이할 수 있단 말인가.
먼저 인생의 본향(本鄕)을 찾아야 한다.
사람은 죽음을 염두 해 두면서 생전에
다음 세 가지 일에 몰두하고 있다.
먼저 율법(律法)주의다.
인간사 모든 규칙과 전통들을 지키므로
하늘에 대한 보험(保險)을 들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율법과 상대적인 신비(神秘)주의인데,
모든 율례를 벗어나 오직 계시(啓示)을 통해서
자신만의 기준으로 마지막을 점쳐 본다.
그리고 윤리(倫理)주의다.
종교를 벗어난 이성(理性)의 보편적인
도구로서 스스로 의인이 되어
오히려 세상을 판단(判斷)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은 위 세 가지는
절대적 기준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종말(終末)의식이 필요한 것이다.
종말주의란 ‘나는 죽어서 그 분 앞에 선다.’는
의식(意識)을 갖고 인생의 본향(本鄕)을
향해 살아가는 자세다.
그러나 현대인은 하이테커 말대로,
모두가 영혼의 고향(故鄕)을
잊고 아버지 품을 떠난 아들처럼
자유(自由)라는 기녀와 현대문명이라는
환락가에서 밤을 지새우며 외로움을 달래보지만
내일에 대한 아무런 기약도 없이
아무런 꿈도 없이 되풀이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자신의 고향과 실존(實存)도 잊은 채,
내세(來世)에 대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바쁜 일상에만 묻혀 살다가,
어느 순간 죽음이 다가올 때 어찌할지
몰라 아이처럼 당황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이 세상은 영원한 세상을 이어주는
교량(橋梁)이므로 현명한 자는 다리에
집을 짓지 않고 건너는 사람이라고 했다.
가장 단순한 이 진리가 고리타분한
사상이 되고 있기에 사람들은
영혼의 본향을 잊고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처음 주셨던 절대자에게 돌아가기
전에 그를 기억하고 본향을 찾으라고
그는 오늘도 우리에게 권면(勸勉)하고 있다.
인생의 진정한 본향을 찾은 후에
죽음에 대한 두 번째 해법은
이제 사명(使命)을 열정으로 감당하는 일이다.
비자를 요구하는 나라들의 특징은
기일이 한정(限定)되어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본향을 가기 위해,
잠시 다리를 건너는 나그네와 외국인들은
기간이 이미 정해져 있기에 그 기일
내에 자신의 사명(使命)을 마치기 위해서
열정(熱情)을 갖고 일할 수밖에 없다.
길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은 피곤하지 않는 것처럼,
내 영혼의 본향은 알고 나그네 같은
삶을 사는 사람에게 열정이란
일생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짧은 생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수 없는
인생의 길을 우리는 다 갈 수 없기에,
사명으로 여겨지는 자신만의
비전과 목표를 향해
모험과 헌신을 아끼지 않는 것이
열정(熱情)의 삶이다.
그러나 본향을 향한 열정적인 삶에도
조심해야 할 두 가지 적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게으름이다.
게으름이란 열심히 일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처음 비전을
포기한 상태를 말한다.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첫 마음은 식어지고
일상적인 환경모드에 길들여져,
이상(理想)은 추락하고
편리함과 맘몬 그리고 쾌락이라는
이성이 가슴을 태우면서 사명에 대한 열정이
식어지게 하는 것이 바로 나태함이다.
두 번째 열정의 적은 불평(不平)이다.
열정을 갖고 일하는 사람도
불평과 원망의 늪에 빠지기 쉽다.
불평은 소명에서 자신의 꿈으로 기준이
바꿔질 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한다.
12정탐꾼이 자신의 기준으로
가나안을 바라보았기에 불평을 했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소명(召命)으로 바라보았기에
두려움이 아닌 감사(感謝)가 넘쳤던 것이다.
감사는 이렇게 모든 환경을 이기게 하는
가장 강력한 권세(權勢)가 있기에
마귀는 감사를 가장 두려워하여
감사하는 사람에게도 접근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본향을 향해
열정을 갖고 일한 후에는 반드시
상급(賞給)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의 시초가 되고 있다.
그래서 진정한 웰-빙은 웰-다잉이다.
진정한 인생의 성공(成功)은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죽는 일이다.
신앙이나 종교를 갖는 이유도
이 땅에서 잘 살기위해서가 아니라
이 땅에서 잘 죽고 본향에서 잘 사기 위함이다.
오직 그 일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이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처럼
본향을 향하여 사명을 위해
순교적(殉敎的)인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인생은 절대로 공수래공수거가 아니라,
결국 절대자 앞에 다시 서서
주거니 받거니,
내 삶이 명백하게 결산될 것이다.
주여,
저는 본향을 향하여
어떤 열정을 갖고 있습니까.
부끄럽게도
부르심에 대한 열정보다는
개인적인 소망에 대한
꿈에 대한 열정만이
가득차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사명이 전이(轉移)되어,
평소 속물로 여겼던 삶의 방식들이
어느덧 제 인생목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끊임없이
저를 부르시고 처음 품었던
그 비전과 이상들이 좀 더 성장되도록
환경과 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훈련하여주시니
감사합니다.
2006년 육이오날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