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피러한님의 글모음

추억 그거 아무 힘도 없어

유앤미나 2008. 3. 20. 19:20
추억, 그거 아무 힘도 없어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지금 인기드라마는
전부 '순(順)'자가 들어간 이름들이다.
'김삼순', '금순이', '이순신'...

그 중에서도 올해 상반기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내 이름은 김삼순'을 하는 날에는
회식날짜도 잡지 않고 시험문제, 정치인 발언에도
그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히트를 치고 있다.


통통하고 촌스러운 노처녀 삼순이를
미워하기는커녕 폭넓게 공감대를 형성하며
열광케 하는 비밀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마도 갈수록 살기 힘든 세상에서
소시민적인 가슴으론 감히 말할 수 없는 내용들을
비현실적일 정도로 저돌적인 그녀를 통해
카다르시스를 경험한 까닭일까.

그 경험이란,
그녀의 당당함 속에
우리의 한(恨)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모 자른 건지 아님
내숭떨며 밀어붙이는지는 몰라도
불리한 조건들이 있음에도 기죽지 않고
자신이 원(願)하는 모습을 향해
그녀는 주저 없이 달려간다.

고등학교 졸업 후 파티셰라는 직업을 위해
무작정 프랑스로 떠났다가 자격증을
갖고 당당하게 돌아오고,

자신이 근무하는 레스토랑 사장인
연하남과의 계약 연애를 통해
자신만만한 사랑 법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매회 마다 삼순이의
엽기적인 말과 행동 속에서도 진솔한 모습이
국민 노처녀로 사랑받게 하는 조건들이 되고 있다.

그녀는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과거(過去)였을 지라도
꿈과 배치된다면 과감하게 버려버리는 삼순이의
성품은 전 애인에게 했던 말을 통해 바로 알 수가 있다.

‘추억까지 더럽히지 말고 멋있게 폼 나게 떠나.
뒷모습이라도 아름답게...

추억(追憶), 그거 아무 힘도 없어.’


많은 사람들은 지나간 추억 때문에
자신의 비겁한 몸 골을 향해
애착하느라 그 추억과 비할 수 없는 오늘을
망치는 경우가 그리도 많은데,

그녀는 현실적인 약점(弱點)들이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고 자신 있게 살아가는 모습이
시청자로 하여금 막연한 신비감을 넘어선
더 아름다운 미래를 공감하면서
그녀에게 중독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눌려있는 한(恨)들을 삼순이가
대변(代辯)해 주기에 열광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된장찌개처럼 구수하고
사람 냄새나는 소박한 가정을 꾸미고
싶어 하지만 그 단순한 꿈조차
세상은 쉽게 허락하질 않는다.

주인공은 극에서 그 작은 꿈조차
펴지 못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의
대변인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먼저 외모에 눌린 사람들이다.

주인공은 서양 사람처럼 넓은 골격에
여자들이 저주한다는 굵은 알통을 갖고 있다.

'어! 쟤는 나보다 더 하네.'
외모 지상주의가 가득한 우리 사회에서
그녀를 보며 동질(同質)감을 넘어서
행복한 상대적인 우월감까지
들게 하고 있다.


또 노처녀들의 속을 뚫어주고 있다.

‘여자 나이 서른에 연인을 만나기란
길 가다가 원자폭탄 맞기보다 힘들다’

‘사랑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운다.’

거침없는 그녀의 대사 속에는
안타까운 미혼녀들의 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에 드라마를 보면서
손 벽을 치는 것이다.





또한 이름에 한 맺힌 사람들이다.

옛날에야 이름에 ‘순(順)’자가
들어간 사람이 많았지만 지금은 왠지
촌스러운 이름의 대명사가 되었다.

집에선 나도 ‘한성식’이라고 부르지만
호적에는 ‘한억만(韓億萬)’으로 나와 있기에
이름 때문에 겪는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삼순이라는
이름에 묻어 나오는 향취가 나로 하여금
더 빨리 공감대를 갖게 했는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삼순이는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눌린 여자들을 대변해 주고 있다.

삼순이는 퉁퉁하여 남자들이
안기도 힘든 여자임에도 잘난 연하남 에게까지
툴툴거리는 모습은 뭇 남성들과 이 사회를
향해 신문고를 울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누이들은 ‘여자가...’라는
소리를 들으며 인내(忍耐)가 미덕이라는 미명하에
온갖 불이익을 당하며 살아왔는데 그 드라마는
본능적인 이러한 여성 욕구들의 해방미디어
창구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분명 김삼순은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인기를 얻고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드라마는 초현실을 가장한 철저히
비현실적인 드라마라는 사실이다.

드라마와 현실은 언제나 다르다.
현실에선 삼순이는 기(氣)가 센 여자로 찍혀서
재벌남자는 커녕 보통 사람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삼순이 이야기를 밤 새워 수다를 떨어보지만
그 수다가 끝나면 이전보다 더 큰 허무가
밀려오는 것이 현실이다.

이 드라마로 인해
김삼순은 돈 벌었을지는 몰라도
열광했던 사람은 다람쥐 체 바퀴 돌 뿐이다.


어느 드라마든 극(劇)에선
말대로 불가능한 일이 거의 없지만,
현실은 북극의 난빙(難氷)보다 더 많은
장애물(障碍物)이 많기 때문이다.

박영석대장이 지난 3월에 북극을 탐험할 때
리드와 난빙으로 죽을 고생을 수 없이 겪으면서,
‘북극(北極)은 정직하다.’고 말했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북극은 오직 북위(北緯)로서만
현재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는 뜻이다.





극에서 김삼순의 당당함보다
현실에서 더 중요한 것은 실력과 함께
때를 아는 지혜라는 것이다.

드라마에선 싱글은 항상 멋지게 나오지만
그런 인생이 되기 위해서 그들은 얼마나
자신을 업그레이드 했기에 우리가
보기에도 쿨 하게 보였겠는가.

김삼순은 괜찮다는 남자는
유부남(有婦男)이 아니면 게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분명 추억에 잡혀있지 않고
성실하게 현실의 과정을 밟았던 사람이었기에
처녀들 눈엔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주여,

삼순이도
그렇게 당당하게 살면서

눌린 자들의 한(恨)을
풀어주었는데,

저는
...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

그런 삶을
소원(所願)해 봅니다.


2005년 7월 17일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

'그룹명 > 피러한님의 글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유와 행복  (0) 2008.03.21
지금이라도 돌아가자  (0) 2008.03.21
신이 내린 선물  (0) 2008.03.20
세상은 넓고 쉴 곳은 없다  (0) 2008.03.20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0) 2008.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