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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와 행복

유앤미나 2008. 3. 21. 13:51



소유와 행복
십 년 동안 방 네 개가 있는 관사(官舍)에서
살다가 두 개짜리 집으로 이사하면서
짐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잘 보지 않는 책들을 폐기시키고
이젠 별로 사용하지 않는 가구와 옷들도
전부 구조대상에 넣었다.
이민가는 사람의 심정으로
짐을 필요한 사람에게 주거나 버림으로
거의 반 가까이를 다이어트 시키는데 성공했다.
이상한 일은 정들었던 그들과 이별하면서
섭섭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희열이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새삼스럽게 포기함으로 평안한 느낌을 이제야
구체적으로 몸으로 체험한다는 사실이
그 분 앞에 부끄러울 뿐이었다.
결혼 할 땐 방 하나에도
책 외에는 채울 것이 별로 없었는데,
아이들이 크면서 방 네 개에 짐들로 다 찼지만
부족함을 느꼈던 나에게 이번 이사(移徙)는
소유(所有)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했다.
누구 말대로
인류사가 소유사라고 말할 정도로
소유에 대해 사람들은 많이 생각해 보지만
이것만큼 그릇된 가치관을 갖는 일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삶의 본질(本質)이 아님에도
항상 생의 주인(主人)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은
영원한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어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야 한다는 본능적 잠재의식이
더욱 가짐을 향해 줄달음치게 했을지 모르겠다.
지금 이 사회는 철저하게도
세속화되어있고 물질화 되어 있다.
사람을 물건 취급하고 물질 소유를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그 능력에 따라 지위와
삶의 질이 향상되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물질도 그 분이 허락하신 것이고
물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소유 자체(自體)가 아니라
소유에 대한 태도(態度)가 인생살이의
행불행을 결정짓게 하는 것이다.

첫째로 소유에 족한 줄로 아는 사람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어떤 분은
이사 올 때나 갈 때의 짐이 똑같다는 것이다.
물건(物件)에 대한 그의 철칙은
새 물건이 필요하면 이전 것은 반드시
버린 후에 그 자리에 새 것을 채워 넣곤 하였다.
이런 식으로 하다 보니 단 한 개의 물건이라도
늘어나는 법이 없이 똑같았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분명
처음엔 필요를 위한 소유였는데,
소유가 늘어나면서
그것은 집착하고 감시하는 수단이 되면서
소유를 위한 소유로 변질(變質)되어
모든 분쟁(紛爭)의 근본이 되어버린 것이다.
소유를 행복으로 여기는 우리는
하나를 얻고 더 얻으려는 에너지로
집착을 넘어서 소유의 노예가 되어 오늘도
허망한 무지개를 �아가지만 가슴은
언제나 공허하기만 하다.
진정한 부자(富者)는 만족하는 사람이요
진정한 현자(賢者)는 자기를 아는 사람이요
진정한 강자(强者)는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요
가장 가난한 사람(貧者)은 이미 소유하고 있음에도
더 얻으려고 애 쓰는 사람이라는 글이 살면
살수록 더 큰 소리로 들려오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행복은 이렇게 먼 내일(來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만족을 느끼는 사람 안에 이미 들어와
함께하는 현재적인 선물(膳物)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자족(自足)에 있다.
자족이야말로 진정한 자립(自立)을 의미한다.
그것은 공급(供給)하신 자를 철저히 인정하므로
자신과 환경을 다스리어 가장 합리적인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는 일이다.

둘째는 소유를 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근본적인 것은
철저하게 의존적인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에
그것이 없어질 때 절망하다가 생을 포기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은
조폭이 아니라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무소유의 사람들이다.
물질에 자족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버린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모든 종교의 기본적인 교리는
내 것이라는 소유관념을 부정하는 것에 있다.
왜 내 것이라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을까.
영생(永生)과 그의 제자 됨 그리고 하늘나라는
서로 통용되는 개념인데 그 조건은 바로
소유에 대한 포기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무소유의 역리(逆理),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소유의 역리가 진리(眞理)인 셈이다.
그러므로 행복이나 잘 산다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릴 때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사랑하면 더 가지려 하지 않는 것처럼,
버리지 않고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버림은 결코 손해가 아니라 우리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사랑의 신비일 뿐이다.
마치 밭에서 감추어진 보화(寶貨)를 발견한 후
숨겨놓고 얼른 자기 소유(所有)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것과 같은 일이다.

셋째는 소유를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현대인들에게 성공의 척도란
얼마나 많은 물질을 소유했느냐에 있지만,
인디언 문화에서는 동족에게 얼마나
많은 봉사를 했는가에 있다.
 에릭 프럼은 인간 생존의 양식에는
소유에 전념하는 소유양식과
자신의 모든 능력을 갖고 섬기는 존재양식이 있는데
산업화된 이 시대에서는 당연히 소유양식이
존재양식을 능가하면서부터 어느 덧
인간성 말살이 찾아 온 것이다.
소유란 집착이나 욕망, 아집 등이지만
존재는 소유에서 벗어나게 하는
생산적인 존재가 되는 
나누는 삶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서 나무는 소년을 위해
자신의 것을 전부 다 줄 때 행복해 했었다.
이처럼 행복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행복은 결코 금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눌 줄 아는 넉넉한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물은 계속 퍼내야 근원이 튼튼해지듯이,
인생도 소중한 나의 것을 퍼주어야
영혼의 샘이 든든해지는 법이다.
결국 사람의 모든 문제는
소유가 아니라 나눔이 없는 것에 있다.
소유냐 존재냐 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생존여부가 달린 필수적 태도이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삶이란
나눔을 통해
쾌락이 아닌 기쁨을
만족이 아닌 평안을
이생이 아닌 영생의 인생을 지향하는 것이다.

주여,
제가 만족할 땐
어디에 누워있어도 천국이나
불만족일 땐 하늘에 있어도 지옥입니다.
어리석게도
이미 많은 것을 받았고
너무나 많은 것을 소유했기에
오히려 감사할 줄 모르고 불평했습니다.
허무하기 쉬운 인생에서
늘 감사하며
버리는 것이 얻는 것임을 알고
언제나
가짐에서 나눔으로
누림에서 섬김의 삶을
살게 하소서.
2005년 7월 31일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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