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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쟁이

유앤미나 2018. 1. 15. 02:19

따라 쟁이 아침에 출근하면서 라디오 사연을 듣다가 웃음이 터졌다. 어느 어머니가 어린 자녀와 함께 전철을 탔는데, 롱패딩을 입은 청소년들을 보고 아이가 큰 소리로 말했다. “엄마, 저 형들, 바퀴벌레 같아~~” 그 말을 들었던 그들은 기분이 나빠 고개를 돌리는데, 엄마는 딸 말에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고 한다. 올 겨울 청소년 사이에 롱패딩이 유행하고 있는데 이 일을 두고서, 소속감과 무(無)개성이라는 두 가지 분명한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왜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그리도 똑같은 옷을 입어야 할 정도로 유행에 민감해야 하는가. 그것은 타인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서 출발되었다. 자신도 롱패딩 유행에 뒤 따르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불안감이 개성까지 생각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게 했다. 어느 평론가는 이런 현상을 ‘따라민국’이라고 했다. 굳이 이런 ‘따라 쟁이’ 현상에서 장점을 찾는다면 침체된 의류 시장에 활기를 안겨 줌에는 틀림없을지 모르겠다. 롱패딩 입는 것을 보고, ‘팽귄 같다’, ‘김밥 같다’, 한술 더 떠서 ‘걸어 다니는 미쉐린 타이어’라고 빗대어 말하는데, 정작 그 옷을 입은 그들은, ‘자기네들이 못 구하니까 부러워서 그런 거 아닌가요?’ ‘남들이 뭘 하든 왜 관심이 많아요?’ 라고 대답하지만 정말로 부러워서 그런 말들을 했을까. 지금은 유행이 광풍처럼 분다. 옷이든 음식이든 방송 탄 곳은 장소 불문하고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에 바로 인증샷을 올리면 광속 급으로 퍼져 나가면서 보는 사람들에게 모방하고픈 본능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렇게 생각 없이 따라하는 현상은 사실 어제 오늘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다람쥐처럼 무분별하게 남을 따라 부화뇌동하는 것을 ‘레밍 효과’(Lemming effect)라는 용어까지 생겨났을까. 뭐든지 일단 휩쓸고 지나가야 직성이 풀리는 현상을 자조적으로 표현해서 ‘따라민국’이라고 했다. 문제는 이런 따라하는 현상은 판단과 비교라는 후폭풍을 낳게 된다. 마치 롱패딩을 입는 사람은 정상이고 안 입는 사람은 비정상 이라는 식의 접근이다. 그만큼 유행은 현실 속에 들어와 사람을 이분화 시키는 짓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런 사회적 현상을 알고 역으로 이용하는 사람은 ‘롱패딩’ 자리에 화제성 이슈를 넣음으로 오지랖을 넘어 참견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이렇듯 유행에 지나친 관심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바로 대한민국의 자화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자조 섞인 웃음이 나오지만 씁쓸하기 그지없다. 최근 한국에 새로운 증후군 하나가 떠오르고 있다. 일명 ‘나만 없어 신드롬’이다. ‘남들 다 있는데 나만 없어’라는 문구에 ‘#’를 달고 비슷한 말을 복사하듯 유행시키고 있다. ‘남들 있는 고양이 나만 없어’가 그 중에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참 웃기는 일이다. 남이 있든 없든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런 현상은 경험을 공유하는 일이 사회적 트렌드가 되면서, 남들도 하는 일인데 나만 못한다면 사회적 분위기 상 마치 자신은 정상인에 못 미치는 것처럼 여긴다. 이것은 공유를 넘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기에 사회적인 위화감을 조성하면서 문제를 안고 있다. 물론 과거에도 유행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획일적이고 다양화하지는 않았다. 공유의 속성과 함께 매체증가로 확장속도가 빨라지면서 지금처럼 한 쪽으로 쏠림 현상은 도래할 수밖에 없었다. ‘나만 없어’ 신드롬은 한 마디로 ‘인정 욕구’을 부르고 있다. 자신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원하는 물건을 ‘득템’ 한 후 인증샷을 남겨야 남에게 인정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진정한 인정받는다는 의미가 퇴색될 지경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생존에 대한 본능이 다 있다. 식욕이나 수면욕을 넘어 인정욕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심리적 욕구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일은 자신이 생존할 가치나 이유가 충분하기에 인정은 살맛나게 할 뿐 아니라, 삶의 목표까지 생기게 하는 긍정적 에너지가 된다. 물론 인정욕구를 받으려면 남과 겨루어야 하는데 승패에 따라 좌절과 기쁨이라는 두 가지 열매가 기다리고 있다. 일평생 살아가는 동안 인간은 수많은 고통을 겪는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부터 소속된 공동체에서 복합적인 관계성으로 인해 고통은 차곡차곡 쌓인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고통의 근원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서 출발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모든 일에서 항상 남과 비교하는 가운데 상대적 빈곤감이 고통의 가중치를 높여주고 있다. 인정받기 위해 비교하고 또한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삶의 한계를 느끼면서 고통은 커져만 간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서글픈 실존적인 현실 앞에 내가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가 내 인생을 결정짓게 만든다. 얼마 전 인구 2만 팔라우가 중국의 단체관광 금지 위협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렇게 작은 나라임에도 자기네는 소국으로 여기지 않고 당당히 주권국가로 중국과 맞서고 있다. 정치뿐 아니라 인생은 더 치열하다. 남 하는 대로 따라 해서는 답이 없다. 그렇다고 오늘이라는 현존을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냥 팔라우처럼 중국 같은 세상과 남 눈치 보지 말고 자존심을 지키며 나라의 주권과 같은 진정한 ‘나’라는 개성을 살려야만, 혼자 있어도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고 소속감에서 소외될까 봐 남들 비슷한 것을 찾는 들개가 아니라 ‘나’다운 생을 살아갈 수 있다. 슈퍼맨들은 어떤 특별한 재능이나 남 다른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러한 외적능력이 전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어느 과정을 지나면서 그들은 참된 인생의 가치를 발견 한 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새로운 목적을 갖게 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슈퍼맨이라 할 수 있다. 이제 그들에겐 외적인 힘이 진정한 능력이 아니라 생의 가치, 의미, 용납 그리고 사랑과 인생의 아름다움이 그들의 존재목적이 되었다. <엑소더스>배경은 인간이 신처럼 군림하던 시대였다. 람세스는 계속되는 재앙 앞에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모세에게 소리쳤다. ‘신은 나야, 내가 신이란 말이야’ 그가 어찌 신이 될 수 있겠는가. 아니 아버지 노릇하나 하기도 눈물겨운데 신이 되겠다고? 다만 내가 신은 아니어도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남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남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뭘 하든지 남 의식하지 않고 판단 기준은 자신에게 있기에 따라 쟁이로 살지 않아도 되는 ‘나’ 다운 멋을 풍기며 사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것은 신이 나를 만드신 이유를 알고 이제 ‘따라 하기’를 넘어 나만의 주체성을 갖고 ‘독립하기’를 통해 이웃에게 인정받는 삶이라면 지금 뭐가 있고 없고는 결단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2018년 1월 14일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드립니다. 사진허락작가:하누리님, 우기자님, 이요셉님, 아굴라님
^경포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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