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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서 간다고 전해라

유앤미나 2016. 2. 12. 21:07

알아서 간다고 전해라 '100세 인생'노래가 작년부터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노래 가사는 아주 단순하지만 의미는 크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과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을 담은 노래로서 나잇대 별로 죽기 싫은 이유를 위트 있게 표현한 것이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 노래는 1995년에 김종완 작곡자가 20년 전 친구 아버지가 50대에 죽자 자식들이 애타게 우는 모습을 보고서 좀 더 오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에 이 노래 말을 지었다고 했는데, 20년이 지난 요즘 이 노래가 더 실감나는 것은 바이오산업과 함께 100세 수명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미 100세 시대를 맞이하여 가장 뚜렷한 변화는 ‘내 주위엔 아무도 없어’라는 마음으로 국민연금 자발적 가입자가 지난해엔 30%나 증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100세 수명이 가능해 지면서 이렇게 오래 사는 것이 과연 축복인지 저주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먼저 더 늘어난 노후생활에 필요한 자금도 부족하고 50대부터 아프기 시작한 몸뚱이를 100세까지 지탱하기도 어렵기에 스스로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 어떻게 살다가 죽는 것이 고상한 일일까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100세 인생’ 원제목도 ‘저 세상이 부르면 이렇게 답하리’였다. 참 의미심장한 제목이 아닌가. 종교 유무를 떠나 최소한 인간이라면 죽음이 날 부를 때 답할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죽기 전에 수 없이 절대자 앞에 어떻게 설 것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살아가야 언제 죽음이 부른다 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세 번의 일생을 산다고 한다. 첫 번째는 엄마 뱃속에서 9달 동안 태생(胎生)으로의 삶이요, 다음으론 이 땅에서 7-80년 동안의 일생(一生)의 삶이다. 만약 이것으로 우리 인생이 끝난다면 살면서 뭐가 두렵겠는가. 사람은 고상하게 정신적인 존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靈的)인 존재이기에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영생(永生)이 있기에 이 땅에 살 때 양심을 저버리고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 사람이 죽을 때 오직 두 가지 인사가 있을 뿐이다. 다시 만날 수 있는 사람에게는 ‘See you again!’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에게는 냉정하지만 ‘Good bye!’라고 마지막 인사를 할 수 밖에 없음을 알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살아있을 때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 몇 일전 어느 지인이 가까운 친척이 62살이 되어 생애 첫 국민연금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암으로 죽었는데 그는 장례 기간 동안 인생이란 참 덧없고 부질없으며 허무한 거라는 생각이 3일 내내 떠나지 않더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인생이 왜 덧없이 느껴질까?’하며 생각의 꼬리를 물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본능에 따라 ‘감각적 쾌락’을 쫓아 살아가고 있지만 만족한 사람이 없기에 ‘윤리적 삶’을 살려고 하지만 이 또한 만족할 수 없는 것은 누구도 ‘죽음’에서 자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나이가 들수록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음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면서부터 죽음과 삶의 경계는 먼 곳이 아니라 가까이 있음을 알기에 깊은 잠에서 깨어날 때 이곳이 혹 딴 세상이 아닌가하고 두리번거리며 아이처럼 두려움에 떨다가 결국 죽음 앞에 홀로 서야함을 부인할 수 없기에 인생이 덧없이 느껴질 수밖에 없으리라 여겨졌다. 모든 철학의 질문은 ‘인생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에 있다. 바이블에서는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 인생은 ‘영원한 본향을 찾아가는 나그네’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므로 짧은 생을 아쉬워하거나 슬퍼하는 대신 차라리 그 시간에 영원한 본향을 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 아니겠는가. 삶의 지혜란 영원할 수 없는 것을 통해서 영원한 것을 얻고 일시적 소유를 영원한 부로 바꾸고 순간의 시간을 영원한 시간으로 전환시킴으로 이 땅을 떠나는 순간 가장 큰 절망이 아니라 가장 큰 소망의 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결국 살아있을 때 죽음을 늘 의식하며 살아야만 마지막 시험을 잘 치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 스스로 죽음을 이길 수는 없지만 마지막 그 날 두려움 없이 서도록 미리 대비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부분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어느 순간에 죽음이라는 개인의 종말을 맞이하므로 그렇게나 죽음을 두려워하기에 오죽하면 암으로 선고받고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라는 말까지 생겨났겠는가. 일이란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은 더욱 중요하다. 인생도 잘 사는 것(well-being)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well-dying)은 더욱 중요하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청지기가 되기도 하고 수전노가 되어 긍휼 없는 심판대 앞에 서기도 한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인생은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죽기 위해 오늘을 사는 삶이다. 사실 단 한 번 죽음 앞에 선다는 일이 단 한 번 절대자 앞에 선다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미래를 알 수 없기에 대다수 보험에 삶을 맡기듯 죽음에 자신 없기에 나름대로 종교를 갖고 신 앞에서 홀로 서는 연습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양에서는 합리주의가 계몽주의 사고로 발현되면서 개인의 자율적 선택의지는 더 분명하게 신과의 관계를 세워나갔지만, 동양에서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초월적인 신으로 보지 않고 다만 사라지는 과정 속에서 보편적 일자(一者)로 보는 사상은 개인보다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므로 자신을 주체로 신 앞에 세우는 일이 그들보다 상대적으로 부족하기에 죽음을 준비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것을 터부시 해 온 것이 죽음 앞에 큰 약점이었다. ‘왜 굳이 의미를 원하는가?’, ‘인생은 욕망이지, 의미가 아니다.’ 채플린 말대로 의미 없이 오로지 욕망대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인생을 살고 싶은가. 의미 있는 삶이란 오늘 이 순간에 내일 그리고 마지막을 생각하며 살아가므로 자신의 인생을 뜻 깊게 보낼 뿐 아니라 남아있는 가족들에게도 큰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이 존엄하다면 기필코 죽는 과정도 존엄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답고 편안한 죽음은 살아있을 때부터 시작된다. 살기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살아야 한다.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한다. 목표를 갖고 순리대로 용서하기 위해 살다가 정작 죽음이 찾아왔을 때 평소 하던 대로 예를 다하여 맞이하는 삶이 바로 잘 사는 길이다. 2016년 2월 11일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드립니다. 사진허락작가ꁾ포남님, 우기자님, 이요셉님
^경포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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