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피러한님의 글모음

파스칼의 내기

유앤미나 2015. 2. 18. 15:31

파스칼의 내기 작년에 어느 방송 다큐 <파스칼의 내기>에서는 21세기 최첨단 과학의 시대는 인간을 달나라까지 가게 했지만 신을 확인 할 수 없었음에도 이상하게도 인간은 여전히 신을 믿고 종교는 오히려 더 번창해왔다는 것이 불가사의한 일이라며 그 증거로 사례 하나를 소개했다. 인도 북부 고산에서 고행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600년 된 미라를 하나 발견했는데 놀랍게도 머리카락과 치아가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을 보고서 인간은 기도와 명상을 통해 몸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하는 의문 속에 <파스칼의 내기>를 인용하면서 신의 존재를 넘어 신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파스칼의 내기>란 다음과 같은 가정을 통해 실제로 신의 존재 유무가 가져다주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실제로 신이 존재하지 않아도 잃을 것이 없지만 만약 존재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잃는 다는 것이다. 반대로 그의 존재하실 것으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존재하든 안하든 잃을 것이 없지만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가 믿어왔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파스칼의 내기>의 핵심이다. 이런 유사한 일들은 인생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들이 많이 있다. 학생이 시험을 대비해 준비했는데 시험보지 않으면 손해 볼 일이 별로 없는 것은 시험과 상관없이 공부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실력이 쌓여가 나중에 어떤 시험이든 담대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마지막 시험은 무엇일까. 아마도 구원의 문제가 아닐까라고 여기는 것은 모든 예술의 주제들이 궁극적으로 구원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 앞에 생각은 더 단순해진다. 구원의 문제는 이미 성직자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많은 문학가들도 주 메시지는 구원을 가르치고 있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괴테의 <파우스트>, 존 스타인벡의 <분노는 포도처럼>등은 인간의 구원에 관한 대표적인 소설이지만 수많은 동화나 노래 그리고 영화까지도 구원이라는 영역을 넘나드는 것은 인간은 종교 유무를 떠나서 스스로 탐욕적이고 한계적인 존재임을 알고 있기에 평생 고민하며 번뇌하며 참회하려는 본능적 욕구가 있기에 예술이든 종교든 교육이든 모든 영역에서 사람들을 구원을 추구해 오며 살아왔던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 인간에게 싸움이란 자기 안의 악을 선으로 바꾸려는 의지의 결단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안의 가장 큰 적은 돈도 아니요 암도 아닌 탐욕이다. 탐욕이라고 그렇게 썩 나쁜 마음도 아니다. 그것은 그냥 신이 없는 것처럼 내 생각대로 살아가라는 본능적 자세다. 처음에 탐욕은 천연적인 상태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기 판단대로 관계를 해석하며 살아가는 동안 스스로 세상을 구원할 것 같은 신의 자리에 들어서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문제라는 것을 종국에 가서야 조금씩 알게 된다. 탐욕은 이토록 무서운 파멸을 가져오기에 탐욕을 버리는 것을 누구는 해탈이라고 했고 누구는 하나님의 마음이 임했다고 했던 것이다. 신의 마음은 탐욕을 버린 가난한 마음이기에 팔복의 하나로 여겼던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인간은 이성을 통해 구원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세상은 완벽한 합리성으로 구성되었기에 관념적인 확실성 속에 모든 지식을 의심하면서 ‘왜’라는 질문 속에 접근하면 인생의 진리를 알게 되고 구원의 길에 이르게 된다고 했다. 신의 은총이 아니더라고 이성의 진리를 찾고 행동할 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논리는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주장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하여 파스칼은 그 해답으로 신을 제시했다. 인간 지식은 불확실하며 물음들조차도 확실치 않음은 세상에는 온갖 모순과 불합리한 조건들이 가득 차 있기에 참과 거짓을 판단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인간 자신도 삶의 일부분에 불과한데 진리의 본질을 어찌 수학적인 방법인 연역과 논증을 통하여 안다는 것이 넌센스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은 이성을 통한 구원을 꿈꾸거나 아니면 선한 행위를 통한 구원을 추구해 왔는데 파스칼은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오만함의 산물일 뿐 불가한 일이라고 일축해버렸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구원은 무엇인가. <레미제라블>영화를 보면 누구라도 구원은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삶이 아무리 고단하고 부당해도 사랑은 인생의 모든 것을 극복하게하고 사랑 안에서만 내일을 꿈꾸며 내일을 기다린다는 교훈을 주었다. 빵 하나 훔친 죄로 평생 전과자로 살아가는 그에게 유일하게 인간답게 대해 준 주교의 사랑에 감화되어 새 삶을 살기로 결심한 장발장의 끝없는 사랑은 마리우스를 구했고 자베르 경감마저 새 사람이 되게 했다. <라보엠>에서 미미는 죽는 순간에까지 로돌포를 보기 위해 그의 방을 찾아 와 그의 품 안을 그리워하며 눈을 감았다. 이것은 인간에게 돈은 필요한 것이지만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운명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라보엠>의 결론과 같은 장면이었다. 인간은 허물투성이다. 어른이 되어도 변하지 않는다. 이런 인간에게 구원 이전에 어떤 행위를 요구했다면 아무도 이룰 자가 없었을 것이기에 조건 없이 사랑이 구원을 얻게 한다. 사랑으로 구원받은 인간은 비로써 사랑이 인생의 가장 큰 에너지임을 알게 되면서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고 사랑으로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어간다. 이제 모든 일의 근거는 사랑에 있다. 사랑하기에 기쁨으로 규율을 지키며 사랑하기에 모든 일들을 좋은 뜻으로 해석하고 사랑하기에 담대함으로 내일을 준비한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데미안을 처음 보았을 때 가장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구절이다. '신에게 홀린'의미를 갖고 있는 <데미안>은 참된 자아를 찾기 위해 기존 세계를 결별하는 데에서 시작했듯이 구원을 찾은 자는 자신과 세상이라는 알을 깨므로 편견과 틀에서 벗어나 하늘로 나는 새가되어 영혼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게 된다. 구원 얻은 자의 꿈은 이제 비어있고 순수한 하늘에 있기에 오늘과 소통하고 내일을 기다리는 자가 된다. 주님, 파스칼의 내기를 하지 않아도 구원은 당신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 이 상황 속에서도 하늘을 바라봅니다. 바라볼수록 확신은 더해가고 보너스로 주신 담대함은 산들을 넘게 하시고 그 때를 잘 대비케 하시니 감사합니다. 길을 보여 주옵소서. 새 가나안을... 2015년 2월 18일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 드립니다.
사진허락작가ꁾEsther SON님, 포남님, 우기자님, 이요셉님
^경포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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