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의 미학.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나는 어떤 용도로 쓰이고 있는지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경중을 떠나 어떤 용도로던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면 보람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려다 문득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딘가.
나는 오늘도 어떤 자리에서 자리매김을 잘 하고 살아가는가.
지금 서 있는 내 자리는 그 용도에 얼마만큼 적절하게 쓰임을 잘 하고 있는가.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을 한다.
그 사람 정말 그 위치가 너무 잘 어울려. 아주 적성에 딱 맞아.
내가 봐도 멋지게 보여. 야, 정말 일처리도 멋지게 하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
인생살이 하면서 흔히들 하는 말 중에 천층만층 구만 층이란 말도 있듯이
우리의 삶의 무게는 간단한 것 같아도 사람마다의 무게의 단위가 다 다르게 마련이다.
나는 왜 이런 고난의 신발을 신고 내 삶의 무게에 짓눌려서 이 고생을 할까 하는 생각이
자신을 짓누를 때면 나는 이렇게 대답을 한다.
그건 네 삶의 무게의 쓰임이 지금 네가 생각하는 그 만큼이기 때문이란다.
너는 지금 그 쓰임의 무게를 생각지 않고 남의 좋은 것만 보고 절망하고 욕심 버리지
못하여 쓰임의 무게를 배로 늘려서 고생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란다.
그러니 지금 부터라도 네가 서 있는 그 자리가 얼마만큼의 쓰임의 무게를 달고 있는지
깊은 생각에 잠겨보아라.
현제의 너의 그 자리는 너를 지탱하는 최고의 자리란 걸 이내 알게 될 것이란다.
수많은 발길이 오늘도 내 삶의 날개를 스치고 지나간다.
늘 하던 일에 대한 권태감이 나를 유혹한다.
이것 아니면 입에 풀칠 못할까 하는 생각이 내 속을 뒤집기도 한다.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싶을 때 삶의 짐을 내려놓고 싶을 때 내가 서 있는 쓰임의 무게를
내 마음의 저울추에다 가늠해 본다.
내 삶의 무게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내 주위에 어떤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지
살아온 과정을 곰곰이 뒤집어 본다.
효과 있는 쓰임으로 살아온 것일까? 아니면 썩은 냄새만 풍기며 살아온 것일까 하는 생각에
나 자신을 미화도 해 보고, 두둔도 해 보면서 저울추를 중간으로 몰아보지만 자꾸만 어딘지
모르게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
긍정적인 사고의 쓰임의 미학은 중립을 지키기도 하고
부정적인 사고의 쓰임의 불만족한 마음은 마음의 저울추를 한쪽으로 기울게 한다.
불만족한 사고의 쓰임은 늘 그만 두라는 생각이고 그만두고 푹 쉬라는 생각은 나를
깊은 수렁의 고뇌로 끌고 다닌다.
다른걸 해봐. 해 보지도 않고 미리 예단을 하지 말고 이렇게 유혹하면서 나를 불안하게
만들 때가 많다.
내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참 많다.
하던 사업 그만두고 푹 쉰다는 생각이 하루가고 이틀 지나 어느 틈엔가 반년이 지나가고
있다.
그들의 마음속은 푹 쉬니까 편하다는 가시방석위의 엉덩이 찔리는 소리를 푸념삼아
하면서 놀아도 마음이 편치를 않다는 것을 여실히 입증을 하는걸 많이 보아 왔다.
푸념삼아 하는 말이 팔자가 편해야 노는 것도 편하지 오죽하면 이런 말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들의 마음엔 넉넉하지 못한 쓰임의 구석이 많은 걸로 보인다.
우선 생활을 하는데도 우리에게 필요한 쓰임의 도구가 수도 없이 많다.
생활도구 뿐만 아니라 나를 지배하는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내게 쓰임의 용도를 다양하게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런 편리한 용도의 기능을 감사한줄 모르고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내 삶이 내 주위에 긴요하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 적절히 쓰임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지 생각이 미치질 못할 때가 많다.
쓰임을 당할 때가 좋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내가 이걸 어떻게 해. 사람 체면이 있지. 이젠 다 틀렸어. 늙어가면서 채신머리없게 그런걸
어떻게 해. 이런 생각들을 버리게 하는 계기가 있었다.
얼마 전 동경 여행에서 보았듯이 팔순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 정성을 다하여 인사를 하는걸
보면서 저렇게 연세가 많아도 자기 직업에 최선을 다 하며 자신의 쓰임을 아름답게 만드는
그 모습에서 나는 오늘도 내 쓰임의 자리를 되새김질 해 본다.
저 사람 참 열심이다.
늘 저렇게 웃는 모습은 걱정이 없어 보이고 평화를 안고 사는 것 같아 보기가 좋더란 촌평에
내 삶의 초석을 놓은 게 아닌가 하는 위안을 해 보기도 한다.
내 주위에 팔순이 넘은 노구를 이끌고도 새벽에 일어나 자기 일을 찾아하는 분들을
볼 때면 부러움의 눈을 뜰 때가 많다.
자신의 부가가치를 높여 틈새에도 녹이나지 않게 마음의 윤활유를 바르는 분들에게
쓰임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있는 당신은 행복의 쓰임을 받았다고
힘주어 말하고 싶어진다.
어떤 쓰임일지라도 악하게만 쓰이지 않는다면 최선을 다 해서 살아보라고
그리고 그 쓰임에 최선을 다 해서 나 역시 살아가야 한다고 내 마음의 저울추를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곳에 올려 세운다.
용도의 다양성이란 말도 있듯이 내 삶도 다양한 용도에 쓰였으면 하는 맘이
때론 나를 지배한다.
결론은 내 삶이 나를 다양하게 부르는 도구로 써지길 비는 마음으로 늘 기도해본다.
다시 말하면 나를 위한 삶에서 나 보다 어려운 이를 위한 삶도 함께 살아봄이 어떤가 하는
소박한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