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스크랩] 꽃들은 말한다 삶에도 향기가 있다고

유앤미나 2012. 7. 25. 13:45

[행복한책읽기Review] 꽃들은 말한다 삶에도 향기가 있다고… [중앙일보]

사진작가가 본 ‘한국의 자연’

빨갛게 익은 산수유 열매에 늦가을 투명한 빗방울이 매달려 있다(서울). 작은 사진은 솜다리. 서양에서 ‘에델바이스’라 불리는 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멸종 직전인데, 설악산의 높은 능선들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강원도 설악산). [도서출판 ‘까치’ 제공]
물은 그냥 두면 대부분은 바다로 흘러간다(전라북도 완주군 대아호).
 
자연기행
강운구 글·사진, 까치
287쪽, 1만5000원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은은한 향기가 퍼진다. 책 속에 빼곡히 담긴 꽃과 나무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땅에서 피고 지는 갖은 식물이 곱디 곱지만 그것을 앵글에 담는 작가의 마음씨도 한결 아름답다. 세상을 보는 여유와 지혜가 느껴진다. 속도 경쟁에 휘몰린 우리들의 생채기를 부드럽게 감싸준다.

작가는 강운구(67)씨다. 흔히 한국 작가주의 사진가 1세대로 꼽힌다. 가장 한국적인 질감의 작품을 남기는 사진가로도 불린다. 우리의 이웃과 풍경을 정직하게 찍어온 그가 이번에는 주로 꽃에 초점을 맞췄다. 꽃을 매개로 우리의 살림살이도 얘기한다. 사계절을 수놓은 형형색색의 꽃이 시각적 즐거움을 듬뿍 안겨주지만 그 사이를 유유히 걷는 작가 또한 사람의 향기를 한껏 발산한다. 한 우물을 파온 장인의 연륜이 드러난다.

사실 작가는 꽃 전문가가 아니다. 그도 “나는 꽃을 전문으로 연구하거나 찍지는 않는다. 다만 돌아다니다가 이 땅의 풍경을 이루는 꽃이거니 싶은 것을 우연히 만나면 잠깐 꿇어앉거나 엎드려서 경배를 올릴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경배’가 예사롭지 않다. 꽃을 들여다보며 인생을 얘기하고 사회를 성찰한다. 게다가 전혀 잘난 척을 하지 않는다. 낮고도 부드럽게 깔리는 목소리가 되레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삶의 모순을 슬쩍슬쩍 건드리는 유머도 있다.

계절이 성하(盛夏)로 접어들 참이다. 장마철이 지나면 곧 해가 작열할 것이다. 이때 우리 산천에는 패랭이꽃이 만발한다. 여러 풀들 사이에서 도드라지게 빛나는 꽃이다. 작가는 순 우리말 이름에 생김새도 소박한 패랭이를 ‘우리 꽃’으로 알고 있다가 중국·일본 등 여러 나라에도 있다는 것을 안 다음 “김이 샌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반성한다. “우리는 힘도 약하고 영토도 작으니까 ‘우리 것’에 집착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의 생각은 꼬리를 문다. 5월 ‘어버이 날’이나 ‘스승의 날’을 상징하는 카네이션도 패랭이과다. 유럽의 패랭이와 중국의 패랭이를 교잡·개량해서 만든 꽃이다. 당연, 카네에션에선 들꽃의 야성을 찾아볼 수 없다. “서양사람들이 집념을 가지고 개량해서 만든 꽃들, 꽃잎이 거의 겹으로 된 화훼류는 말하자면 모종의 직업을 가진, 화장을 짙게 한 도시 여성들 같다.”

자연을 통해 우리를 돌아보는 작가의 성찰은 계속된다. 예컨대 나무에도 노파심이 있다는 대목이 재미있다. 사과나무·감나무는 늙으면 사람처럼 본능이 강해져 때깔이나 크기는 염두에 두지 않고 쓸데없는 잔소리 같은 자잘한 열매를 수없이 맺는다고 한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 나무는 크고 보기 좋은 열매를 맺는 반면 죽음을 예감한 늙은 나무들은 일단 많은 후손을 남기려는 본능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젊은 느티나무는 큰 잎을 달고 여유롭게 너울거리지만, 늙은 느티나무는 작은 잎을 아주 많이 달고 삶에 대한 집착으로 조바심을 친다. 재벌 같은 거대한 나무가 제 목숨이나 걱정하느라고 쩨쩨하게 구는 것이다.”

외떡잎 식물과 쌍떡잎 식물은 외화내빈(外華內貧)을 떠올리게 한다. 외떡잎 식물은 대체로 쌍떡잎 식물에 비해 크고 화려하지만 반대로 꽃잎이 잘 찢어지고, 꽃받침도 없어서 꽃이 다치기 쉽다. 생물학자 파브르(1823~1915)는 외떡잎 식물은 겉은 번드르르하나 속은 별것이 아닌 식물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판소리에 ‘귀명창’이 있다. 소리는 잘 하지 못하지만 많이 들은 까닭에 명창 대접을 받는 사람이다. ‘서편제’ ‘춘향전’ ‘취화선’을 연출한 임권택 감독이 대표적이다. 사진작가 강씨는 ‘꽃의 귀명창’인 것 같다. 식물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오랜 세월 그것과 함께하다가 일가견을 이뤘다. 몇 구절을 인용해본다.

“봄은 마치 문민정부 들어선 뒤의 도심 같다. 억눌려 있던 목소리들이 한꺼번에 시위대의 외침으로 터지듯이 온갖 꽃들이 갑자기 빛깔로 터지며 빛을 내뿜는다.” “산벚나무 꽃은 분홍빛 그것만으로도 아름답다. 그 이웃 참나무의 막 돋아나는 여린 잎의 풀빛과 어울린다. 자연의 빛깔은 다 서로 잘 어울리는 보색관계를 이룬다. 산에, 들에 튀는 빛깔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사람이 만든 인공물일 것이다.” “수선화는 돌 더미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모진 목숨을 이어나간다. 수선화는 이중적이다. 가녀리고 아름답지만 그 뒤에 아주 강한 삶의 의지를 감추고 있다.”

무엇보다 유쾌한 것은 사진 감상이다. 동백·민들레·백합·제비꽃·꿀풀·국화·억새·갈대·개불알풀·진달래·철쭉·할미꽃·물봉선 등등, 우리 산하의 풀과 꽃이 빚어내는 찬연한 교향악,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의 풍경이 발산하는 정서적인 울림’에 취하게 된다. 앞으로 작은 들꽃 하나도 귀하게 다가올 것 같다.

“세상살이에 지쳐서 들꽃이 피어있는 것을 볼 겨를이 없는 사람은 불쌍하다. 들판에 나가서 여러 빛깔로 아기자기하게 피어 있는 풀꽃들을 바라보면서도 무심한 사람은 더 불쌍하다.”  

박정호 기자
2008.07.05
출처 : 50-70대의사랑과 추억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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