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스크랩] 멋없는 세상 멋있는 사람/김태길

유앤미나 2012. 7. 25. 13:38
 

멋없는 세상 멋있는 사람/김태길





버스 안은 붐비지 않았다. 손님들은 모두 앉을 자리를 얻었고, 안내양만이 홀로 서서 반은 졸고 있었다. 차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남자 어린이 하나가 그 앞으로 확 달려들었다. 버스는 급정거를 했고, 제복에 싸인 안내양의 몸둥이가 던져진 물건처럼 앞으로 쏠렸다. 찰나에 운전기사의 굵직한 바른팔이 번개처럼 수평으로 쭉 뻗었고, 안내양의 가는 허리가 그 팔에 걸려 상체만 앞으로 크게 기울었다. 그녀의 안면이 버스 앞면 유리에 살짝 부딪치며, 입술 모양 그대로 분홍색 연지가 유리 위에 예쁜 자국을 남겼다. 마치 입술로 도장을 찍은 듯이 선명한 자국.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운전기사는 묵묵히 앞만 보고 계속 차를 몰고 있었다. 그의 듬직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그가 멋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예술과도 같은 그의 솜씨도 멋이 있었고, 필요 없는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그이 대범한 태도도 멋이 있었다.

멋있는 사람들의 멋있는 광경을 바라볼 때는 마음의 창이 환히 밝아지며 세상 살 맛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요즈음은 멋있는 사람을 만나기가 꿈에 떡맛 보듯 어려워서, 공연히 옛날 이야기에 향수와 사모를 느끼곤 한다.

선조(宣祖) 때의 선비 조 헌(趙 憲)도 멋있게 생애를 보낸 옛사람의 하나이다. 그가 교서정자(校書正字)라는 정9품의 낮은 벼슬자리에 있었을 때, 하루는 궁중의 향실(香室)을 지키는 숙직을 맡게 되었다. 마침 중전이 불공을 들이는 데 사용할 것이니 향을 봉하여 올리라는 분부를 내렸다.

그러나 조 헌은, "이 방의 향은 종묘와 사직 그리고 사전(祀典)에 실려있는 제례 때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불공 드리는 데 쓰시기 위한 향으로는, 비록 만 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은 감히 봉해 드리지 못하겠습니다."하고 거절했다. 중간의 사람들이 몇 번 오고갔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았으며, 중전도 결국 그 향을 쓰지 않았다.

말단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나라의 법도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중전의 분부에 거역한 그의 용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러한 강직이 용납될 수 있었던 당시의 궁중 기풍이 멋있어 보인다.

젊은 시절을 풍류로 소일한 이지천(李志賤)은 어느 날 그가 사귀던 기생을 찾아갔으나, 여자는 없고 그의 거문고만 있었다. 쓸쓸히 않자 기다렸으나, 사람은 오지 않았다. 마침내 절구(絶句)로 사랑의 시 한 수를 지어 벽에 써 놓고 돌아가 버렸다.



그 뒤 10년이 지났을 때, 이 지천은 호남 어느 여관에서 그 기생의 옛친구인 또 하나의 기생을 만났다. 이 여인은 10년 전 친구의 방 벽에 쓰였던 한시(漢詩)를 감명깊게 읽었다고 말했을 뿐 아니라, 그 시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암송하였다.

암송을 마친 노기(老妓)는 자기에게도 한 편의 시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며, 곧 적삼을 펼쳐 놓았다. 이공(李公)은 그 위에 또 한 수의 칠언 절구를 썻거니와, 조촐하게 늙어 가는 한 여자의 모습을 우아하게 그렸다.

한갓 기방(妓房)을 배경으로 한 남녀의 이야기이지만 그 경지가 높고 풍류에 가득 차 있다. 우리 조상들이 즐겼던 풍류, 그것은 바로 멋중의 멋이었다.

어찌 옛날 사람들이라고 모두 멋과 풍류로만 살았으랴. 아마 그 시절에도 속되고 추악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여유를 가지고 오늘의 우리보다는 훨씬 멋있는 삶을 살았을것 같은 생각이 든다.

요즈음도 보기에 따라서는 멋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어쩌다 일류 호텔의 로비나 번화한 거리를 지나면서 눈여겨보면, 눈이 부시도록 멋있는 여자와 주눅이 들리도록 잘 생긴 남자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얼굴이나 체격이 뛰어나게 잘생긴 것도 멋있는 일이요, 유행과 체격에 맞추어 옷을 보기좋게 입는 것도 멋있는 일이다. 그리고 임기응변하여 재치있는 말을 잘하는 것도 역시 멋있는 일이다.

그러나 겉모양의 멋이나 말솜씨의 멋을 대했을 때, 우리는 가볍고 순간적인 기쁨을 맛볼 뿐 가슴 깊은 감동을 느끼지는 않는다. 세상을 사는 보람을 느낄 정도로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역시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무형의 멋, 인격 전체에서 풍기는 멋이 아닌가 한다. 바로 그 무형의 멋 또는 인격의 멋을 만나기가 오늘 우리 주변에서는 몹시 어려운 것이다.



멋있는 사람의 소유자를 만나 보고자 밖으로만 시선을 돌릴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멋있는 삶을 갖도록 노력하는 편이 더욱 긴요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뉘우쳐 보기도 한다. 멋있는 사람과 만나는 것도 삶의 맛을 더하는 길이겠지만, 내 자신의 생활 속에 멋이 담겼음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보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위가 온통 멋없는 세상인데 내가 무슨 재주로 내 마음 속에 멋을 가꿀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은 가린다. 그런 생각부터 앞서는 것 자체가 아마 내 사람됨의 멋없음을 말해 주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현실을 암흑에 비유하고 세상을 부정의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결국은, "네 운명을 사랑하라"고 가르친 니체는 멋있는 철학자였다. 어느 시대인들 세상 전체가 멋있게 돌아가기야 했으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면 어디를 가나 으례 속물과 俗氣가 판을 치게 마련이다. 세상이 온통 속기로 가득 차 있기에 간혹 나타나는 멋있는 사람들이 더욱 돋보일 것이다.

힘도 없는 주제에 굳이 거창한 목표를 세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주어진 현실을 주어진 그대로 조용히 바라보며 욕심 없이 살아가는 가운데 때때로 작은 웃음을 즐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의 멋이라면 멋이요, 맛이라면 맛이 아닐까. (1981.3.14)

김태길(金泰吉) 1920년 충북 중원군 생. 수필가이자 철학자. 1943년 일본 제3고등학교 문과, 동경대 법학부 수학.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및 동대학원 졸. 1960년 미국 홉킨즈 대학원 철학박사 학위,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에서 교수 역임. 1961년 처녀 수필집 <웃는 갈대> 발간. 대표작 : <빛이 그리운 생각들>(65), 장편 수필 <흐르지 않는 세월>(73) 등


The Sea / Andante

출처 : 50-70대의사랑과 추억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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