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스크랩] 뒷줄의 사람들 / 정호경

유앤미나 2012. 7. 25. 12:07


뒷줄의 사람들
정호경

 

사람들은 어떤 일에서나 맨 앞줄의 얼굴 잘 보이는 주인공 역을 원한다. 
주인공이라고 하면 우리는 대뜸 영화나 연극을 떠올리게 된다. 
나의 경우, 영화 ‘햄릿’에서는 우유부단한 내향성으로 고뇌하던 주인공 햄릿의 우울하고 
심각한 얼굴을 기억하게 되고, 연극에서는 어린 시절 시장바닥의 가설무대에서 
처음 본 신파극 <이수일과 심순애>가 나를 감동시켰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는 일본의 신소설 <곤지키야샤 金色夜叉>를 조중환이 번안한 <장한몽長恨夢>을 
각색한 신파극이긴 하지만, 돈의 유혹에 변심한 심순애의 아랫배를 ‘게닷발’로 냅다차는 
이수일의 연기는 나의 어린 시절에 대단한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그래서 
이토록 강한 인상을 남긴 <햄릿>이나 <이수일과 심순애>의 무대에 잠깐씩 나타나 이들 
주인공의 연기를 뒤에서 도와주던 여타의 인물들은 지금 한 사람도 내 기억에는 남아 있지 않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한 달쯤 지난 뒤에 입학기념 사진 촬영을 점심시간에 한다는 
담임선생의 말을 듣고, 넷째 시간이 끝나자마자 옷을 갈아입으러 집으로 달려갔다. 
50명이 넘는 꼬마들의 손바닥만한 학급사진에서 얼굴도 제대로 찾아보기 힘든 판에 
좋은 옷이 무슨 상관이 있었을까만, 나는 윤기 나는 새 옷을 입고 맨 앞줄에 앉아 있는 
나의 영웅적인 모습을 자랑하고 싶었던지 설날에 한 번 입고 벗어놓은 감색 양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집으로 줄달음을 쳤던 것이다. 
 그러나 집에는 어머니도 보이지 않고 텅 비어 있어 헐레벌떡 안방의 장롱문을 열어 간신히
 찾아 갈아입고는 학교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기념촬영은 이미 끝난 뒤였다. 
그래서 나의 맨 앞줄 가운뎃자리의 화려한 꿈은 허망하게 깨어지고 말았다. 
나는 그 뒷날부터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학교가 갑자기 싫어졌다. 그래서 나는 함께 입학한 
동네 친구들보다는 1년이 뒤진 그들의 후배가 되고 말았다. 
이런 사연으로 한 해를 묵고 학교에 재입학한 나의 학업성적은 별로 볼 것이 없었지만,
 체육시간의 100미터 달리기에서는 언제나 다른 친구들보다 2미터나 앞서는 1등이었다. 
가뿐한 다람쥐 형의 몸매 덕분이었다. 하지만, 1년 아래 동네 꼬마 녀석들과의 달리기에서 
1등은 나에게 그다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이렇게 어렸을 적부터 노상 맨 앞줄의 
눈부신 가운데 자리를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요즘의 우리나라 정치마당을 구경하면서 어린 시절의 나를 회상하며 후회하고 있다. 
왜냐 하면 요즘의 우리나라 정치마당의 실상은 잠자리를 설치도록 피곤하고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덮어놓고 맨 앞줄 중앙의 자리만 차지하려고 하는 장돌뱅이 
주인공들이 이토록 떼로 몰려드니 어지럽고 남부끄러운 일이다. 
“비 오는 날 앞마당에 장닭 나서기”라는 속담이 있더니
 “네가 나서는데 내가 못 나설 것은 뭔가.” 하는 식의 무지와 허세가 판을 치는, 
그야말로 낮술이 과한 난장판 대목장이 되어버렸다. 비 오는 마당에 서서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비를 촐촐 맞고 서 있는 모습들이 불쌍하고 가련하다. 이런 꼴이 집집의 귀엽고 
순진한 아이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걱정이다. 내가 제일이고, 내가 최적임자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설치고 있는 뒷마당에서는 많은 백성들이 고달픈 얼굴로 이삿짐을 싸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는지.
나는 텔레비전의 가요 프로를 가끔 본다. 
그 즐겁고 화려한 무대에는 자주 보는 1급 가수도 많지만, 얼굴이 덜 익은 신진가수들도 
메뚜기처럼 가로세로 뛰며 노래하는 젊음의 한마당에 잠깐 동안의 내 인생은 즐겁기만 하다. 
옛날의 무대에는 노래하는 가수 혼자만의 쓸쓸한 자리였지만, 
언제부터인가 앞으로 뒤로 나들고 돌면서 노래하고 춤도 추는 배경 도우미들의 협찬은
 더욱 흥겨운 한마당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뱃고동 소리 들리는 악사들의 반주에 맞추어 혼자 서서 부르던 여가수의 
‘울며 헤진 부산항’도 좋았지만, 요즘의 입체적인 무대효과에서 맛보는 황홀한 
재미는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언젠가 음식점에서 친구들과 점심을 먹으면서 가요 프로의 재방송을 보고 있었는데,
 매사에 빈정대기 잘하는 친구가 한 마디 했다. 
“저 뒤에 몸 흔들면서 노래하는 아가씨들 보이는가?” 
“그런데…”
“저 아가씨들 아버지가 저렇게 종일 몸을 흔들고 있는 딸 직업을 알고 있을까?”
“그야 돈 버는 딸이 자랑스럽기만 했겠지.” 
하고 내가 한 마디 거들자,
“뒤에서 몸 흔들어 주고 돈 받는 것도 가수여?” 
빈정대기 선수 친구는 바싹 구운 전어 대가리를 그 시원찮은 의치로 사정없이 깨물며
 곁눈으로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그 친구의 말에 나는 웃고 말았다. 앞에 나서서 목청을 돋우는 1급 가수 주인공을 위해 
아무 거리낌 없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뒷줄 협찬의 역할이, 이 어지럽고
 매정한 세상에 새삼스러운 의미로 나에게 다가왔다.
무대 맨 앞에 서 있는 1급 가수의 노래를 내 일처럼 즐겁고 조화로운 한 판으로 만들어 
주면서도 끝내 뒷줄의 겸손하고 충실한 협찬에서 끝을 맺는 그들의 진실한 모습이 나에게는 
정말 훌륭하고 아름다운 주인공의 모습으로 돋보였다. 
 우리를 진심으로 감동하게 만드는, 아름다운 주인공을 나는 뒷줄의 그들에게서 보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좋아하고 존경한다.




音:Misty Rain / 김윤
출처 : 50-70대의사랑과 추억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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