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타고 가는데 틀어둔 라디오에서 70년대의 팝송이 흘러 나온다. 노래가 끝나자, 진행자가 “참 좋죠?” 한다. 그러더니 “이런 노래를 듣고 있자면 확실히 음악은 발전해 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다만 변화해 왔을 뿐이죠.” 이말을 듣다가 나는 쾌재를 불렀다. 확실히 그렇다. 문학은 발전해온 것이 아니다. 다만 변화해 왔을 뿐이다. 그는 평소 막연하던 내 생각을 꼭 꼬집어서 말해 주었다.
연구실의 컴퓨터는 팬티엄 급인데, 집에서는 386 급을 쓰던 때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글 3.0으로 문서를 작성하지만, 집에서는 2.5버전으로밖에는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에 와 작업을 계속하려면 학교에서 저장할 때 반드시 2.5버전으로 해야만 했다. 내 문제는 번번히 이 대목에서 발생했다. 깜빡 2.5버전으로 저장하는 것을 잊고 집에 와서 컴퓨터를 켜면 ‘읽을 수 없는 파일입니다’라는 메시지와 만나게 되는 것이었다.
간혹 우리가 옛글과 만나는 일이 이와 비슷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예전에는 참으로 감동적이었을 그 글들이 이제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을 만큼 생뚱스럽게 여겨진다. 두 개의 서로 다른 버전을 호환해서 읽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의 개발이 참으로 긴요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대학에서 고전을 가르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김시습의 『금오신화』를 강독하면 학생들은 따분해 한다. 그러면서, 그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천녀유혼’이나 ‘은행나무 침대’, 아니면 더 황당한 ‘사랑과 영혼’과 같은 영화를 보고서는 제법 느낌이 온다는 표정을 짓는다.
옛글을 왜 읽으라는가? 옛글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그때 거기’의 삶을 ‘지금 여기’로 옮겨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조면희 선생의 『우리가 정말 읽어야 할 우리 옛글 백가지』를 보며 나는 이런 의문을 떠올려 본다.
이 책에는 공적인 글에서 가전체 소설, 편지글, 상소문, 기행문, 그밖에 다양한 내용의 논설문과 설명문들이 수록되어 있다. 시기도 신라의 최치원에서부터 조선후기 박지원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장가들이 망라되어 있다.
그런데 어떤 글들은 읽어도 무슨 소린지 잘 알 수가 없고, 각별히 감동적이지도 않다. 가전체의 경우 각주가 지금보다 열 배쯤 더 붙어야 행간의 의미가 겨우 잡힐 듯 하다. 번역은 깔끔한데도 그렇다. 왜 그럴까? 이제 이런 옛글들은 외국글을 읽는 이상으로 품과 노력이 든다. 문화 배경이 다르고, 삶의 인식이 달라졌기에 그렇다. 옛글이 단지 따분하지 않게 읽히려면 그저 잘된 번역만으로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장대하던 글쓰기의 전통은 이제 어데가서 찾을 것인가?” 나는 요즘 이렇게 서문을 시작했으면 싶은, 고전 문장이론 정리에 몰두하고 있다. 글쓰기는 선인들의 삶에 있어 참으로 중요한 생활의 일부였다. 나는 손가는 대로 이리저리 들춰 보다가 생활과 밀착된 그들의 글에서 유장한 가락과 힘을 느낀다.
특히 이 책에서 눈길이 머무는 곳은 ‘설(說)’체의 글이다. 늙은 뱃사공과의 문답을 다룬 권근의 글, 나무 잘 타는 사람의 재앙을 이야기 한 강희맹의 글, 좀벌레 때문에 본성을 잃어버린 병든 대나무 이야기. 이밖에 나무 뿌리로 만든 침상에서부터 빠진 이빨에 관한 단상, 늙은 말의 이야기도 나오고, 그물 깊는 어부의 눈을 통해본 처세의 문제, 낚시 속에 담긴 인간학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정작 필요로 하는 것은 이들 글에 담긴 정보가 아니라,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삶의 맥을 넌지시 짚어낼 줄 알았던 그들의 지혜의 눈길이 아닐까? 다만 나는 이 책 속에 선인들의 인간적 체취가 물씬한 서정 산문이 더 많았더라면 오늘의 독자들이 좀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