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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탁월한 비유와 상상력의 시인 이매창 ![]() o 천대받는 신분, 천부의 재능 이매창(李梅窓:1573~1610). 비유의 격조를 알고 인간됨의 품위를 지녔던 조선 중기의 기생이자 시인이다. 38세에 요절한 그녀는 계유년(선조 6년)에 태어났다고 해서 계생(癸生), 계랑(癸娘)이라 불리기도 했다. 매창은 아전 이탕종(李湯從)과 기생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다. 하지만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 허균(許筠), 이귀(李貴) 등과 깊은 교류를 맺고 지냈다. 부안(扶安)의 기생이었던 이매창은 개성의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의 명기 중의 명기로 손꼽히는 여성이다. 그녀가 지은 시들은 여성적 정서가 잘 표현됐다고 평가받고 있는데 그 중에‘추사(秋思)’,‘ 춘원(春怨)’,‘ 견회(遣懷)’,‘ 증취객(贈醉客)’,‘ 부안회고(扶安懷古)’,‘ 자한(自恨)’등이 유명하다. 시뿐만 아니라 이매창은 가무와 현금에도 능한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 현종 9년(1668) 10월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소재 개암사(開岩寺)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한『매창집』의 발문에는 매창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계생의 자는 천향(天香)인데 스스로 매창이라 호를 지어 불렀다. 부안현의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딸이다. 만력(萬曆) 계유(1573)에 나서 경술(1610)에 죽으니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평생 노래 부르기와 시 읊기를 잘 했으며 수백 편의 시가 있어 한때 사람들 입에오르내리더니 지금은 거의 흩어져 없어졌다. 숭정(崇楨) 후 무신(1668) 10월에 아전들이 외우며 전하던 여러 형태의 시 58수를 얻어 개암사에서 목판에 새긴다.” 매창은 천대받던 기생의 신분으로 그늘진 생의 뒤안길을 걸어갔지만 명문가의 규수는 누릴 수 없었던 당대 문인들과 교유했으며 빼어난 글재주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런 까닭에 불과 38년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이 그의 작품을 아끼고 삶의 자취를 오래도록 기리는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시가‘사랑’이라는 보편적 정서를 담고 있으면서도 지나치게 속되거나 평범하지 않으며 탁월한 비유를 통해 공감을 얻는 재능이 단연 돋보이기 때문이다. 1974년 부안 읍내 북쪽에 우뚝 솟은 상소산 기슭서림공원에 매창의 시심과 문학정신을 기리는 시비가 세워졌다. o 개성에는 황진이, 부안에는 이매창 매창은 여러 모로 황진이와 비교되는 인물이다. 물론 황진이는 매창보다 한 세대쯤 앞선 사람이기는 하지만 모두 조선 전기에 활동하면서 기생의 신분으로 많은 일화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한시와 시조 작품이 인구에 회자됐다는 점에서 흥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묘한 차이를 보인다. 조선 중기 문인 유몽인(柳夢寅)은『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황진이를“세상의 구속에 얽매이지 않고 협객으로서의 기질이 있는 여자(女中倜任俠人)”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만큼 황진이의 삶은 자유로운 것이었다. 금강산을 여행하기 위해 남자와 동행 하는 등 그의 행적에는 당대 여성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기행이 쌓여 있다. 이 때문에 황진이의 한시에는 그리움의 정서를 아름답게 풀어내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박연폭포의 장쾌한 모습을 시원하게 그린 작품도 있다. 이에 비하면 매창의 삶은 허균의 표현대로‘고고하고 한적한’삶이었다. 자신의 호도‘매화꽃 피어난 창(梅窓)’이라고 지었으니 평소 성품이나 삶의 지향을 짐작할 만하다. 그의 시에는 자연속에 묻혀 지내는 삶이나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 등이 자주 보인다. 슬픔 가득한 그리움의 정서를 기반으로 했음은 물론이다. 매창의 한시에는 기생으로서의 삶이 그대로 묻어 있다. ‘어떤 취객에게 주는 시(贈醉客)’에서 매창은 이렇게 읊고 있다. 취한 손님께서 제 비단 적삼을 잡으시니 醉客執羅衫 잡힌 손 따라 비단 적삼 찢어지네요 不惜一羅衫 비단 적삼이야 아깝지 않지만 羅衫隨手裂 은근한 정 끊어질까 두렵습니다 恐恩情絶 기생과 양갓집 규수사이에 娼女與良家 묻노니 그 마음 다를 게 뭔고 欺心問幾何 슬프다 송백같이 굳은 절개로 可憐栢舟節 두마음 안 먹고자 맹세하노라 自失也費 그러니 매창의 병은“봄날의 상심 때문이 아니라(不是傷春病) 그대 생각 때문에(只因憶玉郞)”늘 불편하다. 그런 까닭에 오직 시와 거문고에 마음을 의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수광(李磎光)은『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매창이 죽을 때 거문고를 함께 묻었노라고 전했다. 살아 생전에번화함을 좋아했으니 깊은 산 속에 묻지 말고 한길 가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던 황진이와 사뭇다르다. 수백 수의 한시 중 남아있는 58수를 보면 매창이 얼마나 다양한 의식지향을 보여주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흔치 않은 경우인데 그만큼 심적 굴곡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는 뜻이다. 그러한 심적 굴곡이 한적하고 고결한 성품에 틈을 만들었고 그 사이를 비집고 터지는 한숨은 주옥같은 시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녀의 시는 기생의 신분으로 사랑하는 님을 그리는 연시에서 탁월함을 보여주었으나 기품이 있어 속되지 아니했고 탁월한 비유의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호방함의 정도가 현실을 초월해 선계에 이르렀을 정도로 그 정신세계는 넓고 풍요로웠다. ![]() 참고문헌 허미자,『 이매창 연구』,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1988 『매창전집』, 도서출판 고글, 1998 심세진,「 이매창의 생애와 문학」, 홍익대 석사 논문, 2006 |
출처 : 50-70대의사랑과 추억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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