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스크랩] [미술이야기]고전미의 연금술사, `라파엘로`

유앤미나 2012. 7. 1. 16:47

PORTRAIT of Bindo Altoviti, 1512-1515


라파엘로는 르네상스 전성기의 주인공이다. 바사리는 '예술가의 열전'에서 고대 이래 미술의 절정은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에 의해 달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들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리는 일은 불가능하니 후배 화가들은 이들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이 미술을 잘하는 지름길이라고 권장하기까지 했다. 기존 화가의 화풍을 모방하는 권고는 오늘날처럼 원작성이 중요시되는 시대에는 큰일날 소리이다. 하지만 라파엘로가 당대 최고의 작가였다는 주장은 오늘날에도 반박의 여지가 없다.

이보다 더 조화로울 수는 없다

라파엘로는 1483년 우르비노라고 하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우르비노는 로마 북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다. 라파엘로의 아버지는 우르비노의 유명한 군주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궁정에서 봉직한 궁정화가였다.1504년 예술이 가장 활기차게 피어나던 피렌체에 도착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스물을 갓 넘긴 젊은 라파엘로는 활기찬 이 도시의 풍경과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라는 두 거장의 엄청난 파워에 자극을 받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미 두 거물급 예술가들에게 기죽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그들 못지않은 라파엘로의 재능과 역량을 말해준다.

라파엘로의 세속적인 성공은 교활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1508년 고향 선배였던 건축가 브라만테의 소개로 로마 교황청에 입성했다. 당시 교황청에는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거대한 영묘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제작하기 위해 머루르고 있었다. 라파엘로에게 주어진 일은 스탄차라고 불리는 방들을 프레스코화로 장식하는 것이었다. 그 첫번째 방이 바로 유명한 '아테네 학당'이 그려진 세냐투라 스탄차이다. 이 방이 성공적으로 그려지자 라파엘로는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이후 교황청의 스탄차 말고도 많은 주문을 받게 된다. 라파엘로의 공장은 중소기업 수준으로 규모가 커졌다. 그의 제자는 수십명에 이르렀으며, 그들은 각자 맡은 일에 따라 선생의 작품을 완성해갔다.

당시 추기경 비비에나가 자신의 조카딸을 이 화가에게 시집보내려 했을 정도로 라파엘로의 인기는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심지어 그를 추기경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여자를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성사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할 정도이다. 실제로 라파엘로는 호색가였으며 때 이른 그의 죽음도 성적으로 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520년 서른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아름다운 그림들을 남겼으며 이들 작품은 후대 화가들에게 영감의 근원이자 완벽의 전형, 이상적인 고전주의의 모델로 여겨졌다. 회화사적으로는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보다 라파엘로가 더 많은 영향을 미쳤을 정도이다.


Portrait of Agnolo Doni, 1506

PORTRAIT of Maddalena Doni, 1506


푸근한 새댁, 날카로운 남편


라파엘로는 페렌체에 체류하던 1504년부터 1507년 사이에 여러 점의 초상화를 제작하였고 그 후 로마에서도 여러 점을 그렸다. 먼저 페렌체 시기의 대표작으로 도니 부부의 초상화를 꼽을 수 있다. 젊은 부부가 서로를 바라보는 자세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이들은 당시 피렌처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뇰로 도니와 그의 아내 마그달레나 스트로치이다. 스트로치라는 성은 메디치 가문과 쌍벽을 이루던 피렌체 최고의 명문가로서 상인 가문과 명문가 자식들 간의 결합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여인은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와 유사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긴 머리에 가슴이 파인 드레스를 입은 것이며 왼손 위에 오른손을 얹은 모습이 너무나 흡사하다. 배경을 자연으로 한 것 또한 일치한다. 라파엘로가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를 참조했을 뿐만 아니라 거의 베꼈다고 무방할 정도이다. 하지만 이러한 외적인 요소를 벗어나면 라파엘로의 작품은 '모나리자'와 개념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의 배경이 뿌연 안개에 싸인 어슴푸레한 저녁 무렵이라면, 라파엘로의 마그달레나는 맑고 청명한 한낮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가 입은 옷의 색상은 선명하고 공기는 맑고 산뜻하며 인물의 윤곽선은 또렷하다. 레오나르도가 그림을 통해서 자연의 법칙과 신비를 보여주고 있다면, 라파엘로는 그림은 그저 그림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배경의 풍경은 자연 현상을 탐구한 것이라기보다는 구색을 잘 맞춘 풍경처럼 보인다. 이들이 걸친 아름다운 색상의 옷과 반지, 목걸이는 상류층 신분임을 보여준다.

이 초상화를 보고 있노라면 화가가 그림이란 선과 색채가 아름답고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명료한 그림, 이것이 바로 라파엘로가 추구했던 예술의 열쇠이다. 그래서인지 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신비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살과 뼈가 있는 인간, 마음이 푸근해 보이는 부잣집 젊은 새댁과 날카로운 인상의 상인 남편이 있을 뿐이다.


Cardinal Tommaso Inghirami, 1515 - 1516


도서관 사서와 궁정인


라파엘로는 로마에 체류하면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그 중 두 남자의 초상이 있다. 1515년경에 완성한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톰마소 잉기라미이며 직업은 바티칸 도서관장이다. 강렬한 빨간색 옷과 모자를 쓰고 있으며 배경은 짙은 단색으로 처리했다. 약간 위를 바라보고 있는 눈을 자세히 보면 사시임을 알수 있다. 얼굴의 결함을 피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솔직하게 표현하였다. 주인공은 책상 위에 놓인 공책에 펜으로 무언가를 쓰려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사람의 직업을 보여주려는 듯 책상에는 고급스럽게 장식된 책받침과 두꺼운 책, 공책, 잉크 등이 보인다. 사실주의를 추구하면서도 인물을 이상화시키는 라파엘로 특유의 화풍이 엿보인다.


Portrait of Baldassare Castiglione, c.1515


또 다른 초상화의 주인공은 '궁정인'이라는 유명한 책의 저자인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이다. 미술뿐만 아니라 문학의 중심지 역시 군주들이 살았던 주요 궁정이었다. 당시 궁정은 정치의 중심지이자 문학과 예술의 중심지였다. 카스틸리오네의 책은 궁정 예절과 이상적인 생활에 대해서 쓴 궁정문학이다. 흥미로운 것은 과거 중세 시대에는 문학을 이끌어나가던 곳이 교회였는데 이제 세속, 그 중에서도 궁정이 문학과 예술의 메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궁정은 냉혹한 정치 현실이 지배하던 곳이었지만 이상을 추구하는 아름다움 또한 공존하고 있었다.

그가 '궁정인'에서 제시하는 개념 중에 '그라치아'라는 것이 있다. 영어로 그레이스에 해당하는 말로서 우미(優美)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즉 궁정인은 이 그라치아를 갖추어야 하면 얼굴이나 행도이 인위적으로 노력한 것처럼 부자연스러워서는 세련되지않아 안 되며, 가장 자연스러우면서도 세련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의 회화도 바로 이 같은 그라치아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라파엘로의 그림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바로 그라치아이다.

검은 모자 아래 빛나는 파란 눈의 이 중년 남자는 왠지 초조하고 신경질적이며 고독을 감추고 있는 듯하다. 바로 모든 것을 다 갖춘 듯이 보이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그 무엇이다. 추상화가 인물의 외면 뿐만아니라 내면세계까지 표현하고 있다면 그것은 초상화의 최고봉에 도달한 것이다. 바로 이 그림에서 화가는 가장 이상적인 궁정인의 뒤에 감추어진 내면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바로 현대인의 외로움 같은 거다.


Joanna of Aragon,


여인의 품위와 유혹


여기 1518년경에 그려진 '조반나 아라고나'가 있다. 이 여인은 나폴리의 왕 페르디난도 1세의 손녀딸이자 아스카니오 콜론나의 아내이다. 교황 레오 10세가 로렌초 데 메디치와 막달레니앵 드 라 투르 두베르지의 결혼식을 기념하여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에게 선물한 것이다. 그러니까 교황 레오 10세가 자신의 초상화를 서둘러 제작케 한 것도 장차 있을 메디치 가문과 프랑스 왕가의 결혼식장에 걸기 위해서였다. 그 밖에도 이 여인의 초상화를 라파엘로에게 주문하여 프랑스 왕가에 선물하였던 것이다. 당시 메디치 가문이 프랑스 왕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모델은 당시 여인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라파엘로는 제자 줄리오 로마노를 나폴리로 보내 여인의 실물 스케치를 맡겼다. 라파엘로는 제자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의 모습으로 그렸다. 그녀가 입고 있는 붉은빛 드레스는 너무나 아름답다. 실물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느낌을 표현하는 대신 옷을 통해 여인의 이미지를 나타낸 것처럼 보인다. 이 초상화가 주목을 끄는 것은 여자이지만 무릎까지 그려진 것이 통치자 초상화의 유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도상은 이후 영국의 여왕들을 비롯하여 유럽 전역에서 여왕이나 품위 있는 여인들 초상화의 전형이 되었다.


Portrait of a Young Woman (La Fornarina), 1518-19


라파엘로가 그린 그림들 가운데 가장 사적인 그림을 들라면 '라 포르나리나'를 꼽을 수 있다. 주인공은 라파엘로의 애인으로 일명 '빵집 딸'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이름은 마르레리타 루티이며 로마의 산타도레아 가두에서 빵집을 운영하던 프란체스코 루티의 딸이라고 한다. 라파엘로가 지극히 사랑했던 여인이며 바시리는 라파엘로가 죽을 때 이 여자가 살아갈 수 있도록 재산을 남겼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이 여인은 라파엘로가 키지 궁을 장식할 무렵에 모델 또는 시녀로 들어왔다가 애인이 되었으며, 1514년부터 라파엘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모상'과 '의자의 성모상'을 비롯한 몇몇 성모상의 모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동그스름한 귀여운 얼굴의 이 여인은 대담하게 젖가슴을 내놓고 있으며 속이 훤히 비치는 베일을 두르고 있다.

이 여인은 앉아 있는 모습이며 무릎까지 그려졌다. 당시 일반인의 초상을 무릎까지 그린 예가 없고 성모자상에서나 이런 도상이 일반적이었음을 돌이켜 볼 때, 이 작품은 화가가 사랑하는 애인에게 보낸 최고의 찬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화가는 이 사랑스런 여인의 왼쪽 팔에 '우르비노의 라파엘로'라는 사인을 그려넣음으로써 애정을 표시하였다.



고종희의 <르네상스의 초상화 또는 인간의 빛과 그늘> 中
출처 : 50-70대의사랑과 추억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