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辱)과 인생
어느 방송에서는
‘10대, 욕에 중독(中毒)되다’ 편을 통해
욕의 사용 실태와 무분별한
욕설 원인에 대해 심층 분석했다.
그들은 욕을 중간 토씨로 사용할 정도로,
하루에 백 번 이상
욕으로 시작하여 욕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엄연히 우리말에는
다양한 부사(副詞)가 있음에도
지금 우리 청소년들은 그 모든 부사를
‘jonna’로 사용하고 있다.
어느 가수는 신입생 대상으로
욕설 섞인 강연을 해 논란을 빚고 있다.
새삼스런 일은 아니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욕이 무슨 필요악이라도 되듯이,
욕을 하고 욕을
권(勸)하고 있는 세상이 되 버렸다.
오죽하면 어느 학교에선
다섯 명의 남학생이 모범상을 받았는데,
그 상을 받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욕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이런 세상(世上)이 되었단 말인가.
도대체 왜 이렇게
세상엔 욕 천지(天地)가 되었을까.
먼저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의 보급이
청소년들의 욕설 사용빈도를
증가시킨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說得力)을 얻고 있다.
특히 가장 대중적이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TV 방송에서의 욕 논란(論難)은 새삼
어제 오늘일도 아니다.
물론 어른보다
청소년층이 욕을 많이 하겠지만,
어른 중에서도 저학력이나
저소득층 일수록 더 많이 하는 경향(傾向)이 있다.
그렇다고 엘리트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욕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환경에 따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욕을 입에 달고 살기는
그들도 역시 예외(例外)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욕은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언어는 사회의 거울이므로
이런 외적인 조건들보다는
근본적으론 사회(社會) 환경이 크다는 것이다.
더 큰 가치를 어디에 둘지
갈팡질팡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청소년들이 욕에 중독되도록
만들었다고 지적(指摘)한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아무데나 침 뱉고
담배꽁초나 쓰레기를 버려도
양심의 가책도 없고,
또 그런 행동들을 제지할 어른도 없는
이 사회가 가장 큰 주범인 셈이다.
어느 교수는 욕이
10대들의 하위문화가 되면서
아무도 문제(問題)제기를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지적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욕(辱)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인격을 무시하는 모욕적인 말이나
남을 저주할 때 쓰는 말이다.
마치 멀쩡한 하늘에서 갑자기
벼락을 치듯,
한 순간에 간담 한복판이나
정수리를 후려치는
마음의 흉기(凶器)가 욕인 셈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도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욕을 할 수 있으므로,
욕이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욕을 함으로 어떤 영향이 미치는지
알아야만 한다.
첫째로 욕과 감정(感情)처리의 관계다.
사람들이 욕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는,
기분이 나쁠 때 (25%),
연대(連帶)감 조성을 위해 (50%),
강한 사람에 대한
자기 방어용으로 사용할 때 (2%),
그리고 기타 이유로 23%가 욕을 한다고 했다.
결국 욕이란 잘못된 의사소통의 하나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욕은 자신의 내면적인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좋은 점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욕은 상대에게
인격적인 상처뿐 아니라
여러 가지 손해(損害)를 끼치게 된다.
아니 타인보다도
본인에게 더 큰 손상을 주게 된다.
그것은 욕을 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공격적인 성격으로
바뀌면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자기발전은
더욱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욕은 하나의 자극(刺戟)이다.
욕을 할 때 거의
자극에 대한 반응을 하게 되는데,
대개 부정적인 감정이
수반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욕은 결코 단순(單純)한 반응이 아니다.
그것은 욕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복잡한 정서가 숨겨있는데,
스트레스는 기본이요
채우지 못한 욕구,
그리고 여러 요인으로 인한 열등감이나
억압 등 다양한 감정이
내재되어 있다가,
무슨 일로 자극을 받으면
그 쓰레기들을 쏟아 내곤 한다.
온갖 악취가 나는 이 오물을
처리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꿈에 불과(不過)할 것이다.
이 마음의 쓰레기를
해결(解決)하는 최선의 방법은
올바른 의사소통에 있다.
둘째는 욕과 의사소통(意思疏通)의 관계다.
욕은 당연히 잘못된 의사소통이지만
최악의 해결방법이다.
사람들은 자기감정을 다루지 못해
욕이라는 극약 처방을 사용하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욕을 통해
공격적으로 대화를 시도하기도 하고,
또 단순히
시선을 끌기위해 습관적으로
욕(辱)을 하는 사람도 있다.
어찌되었든 이 모든 경우를 통해
욕이라는 의사소통을
사용(使用)하고 있다는 것은
못마땅한 자신의 감정을 감추기 위한
어설픈 방법이요,
그만큼 자신은 사회적 기술이
부족하다는 것을
만인 앞에 공개(公開)하는 꼴이 된다.
말은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능력이 되고 있는 것은,
그것은 의사소통(意思疏通)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싸움의 근본원인도
잘못된 의사전달에서 비롯되고 있듯이,
현대사회가 대중사회가 되면서
바르게 의사표시를 한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바른 의사소통이 될 때
자신의 주장을 바르게 세울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올바른
인간관계가 만들어져 간다는
과정이 더 소중한 소득일 것이다.
결국 모든 인간관계란
서로간의 의사소통에 따라서
관계가 맺어지게 된다.
올바른 의사소통은
단순히 내 의사를 올바르게 전한다는
단기적(短期的) 목표를 넘어서,
상대방을 배려하므로
진정한 대화를 할 수 있고,
그와 시선을 마주할 수 있고
마음을 교감할 수가 있어
상대와 하나 되므로,
언어가 존재하고
이웃이 존재(存在)하게 된다.
셋째는 언어와 인격(人格)의 관계다.
의사소통엔 여러 방법이 있다.
욕도 그 중의 하나겠지만,
좀 더 바람직한
의사소통은 상대를 배려한 아름다운 말에 있다.
신은 인간에게 아름다운 관계(關係)를
만들기 위해 언어를 주셨다.
그러므로 말은
그 사람의 인격(人格)이 되고 있다.
‘말’을 늘리면 ‘마알’이 된다.
‘마알’이란 마음의 알갱이라는 의미이므로,
말을 통해 얼마든지 상대(相對)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말과 글을 통해 그 사람의
한계를 알 수 있기에
우리 조상들은 사람을 평가할 때
신언서판(身言書判)으로 기준을 삼았던 것이다.
한 샘에서 두 샘물이 나올 수 없듯이,
단물이므로 단물을 내고
쓴물이니까 쓴물을 내듯이,
말이 곧 그 사람의 인격(人格)이 되는 법이다.
잎이 무성할수록 열매가 적다는 말과
물은 깊을수록 소리가 없다는
속담은 일치(一致)된다.
잘난 사람일수록 함부로 말하지 않고
말을 아낀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어리석은 사람은
혀로써 무지(無智)함을 드러내지만,
지혜로운 자는 말로서
온유함을 드러낸다.
언어는 이렇듯 인격을 나타내지만
궁극에 가서는 그 말이
그 사람의 인생(人生)이 되곤 한다.
‘차 조심하라’는 말보다는
‘오늘도 말조심하라’는 말이 더
설득력을 얻는 것은
‘말이 씨가 된다.’는 격언처럼
말이 쌓여 운명이 바뀐다는 것을
우리는 인생을 통해
이미 터득(攄得)했기 때문이다.
태초부터 말씀이 있었듯이,
사람은 물질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로 사는 존재다.
그러므로 가슴속에 품고 있는
그 한마디 말이
그 사람의 실존(實存)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경과 운명을 탓하기 전에
먼저 말부터 고쳐야 한다.
욕은 물론이고
거칠고 상처 주는 말을 버리고,
어찌하든지 말을 통해
상대를 인정(認定)하고 용기를 주게 될 때,
인생의 파랑새는 어느 덧
자신에게 날개 짓을 하게 된다.
그것이 가능할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람은 말하는 순간에
이미 자기최면에 빠져 신념(信念)화 되어
태도부터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태도가
인생의 좋은 습관이 되고,
습관은 인생을
만들어 주기에 가능(可能)했던 것이다.
주여,
말이 인생이라는
진리를
날마다 경험하면서도
말로
당신을 부인하고
이웃에게 상처를 줄 때가 많습니다.
제게 자갈을 물게 하시어
많은 말보다는
살리는 생명의 말을 하게 하소서.
때에 맞는 한 마디로 평안을 주며,
정다운 말 한 마디로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
부디 이 입술로 많은 사람들을
축복하게 하소서.
2009년 3월 23일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이 드립니다.
사진작가ꁾ투가리님 해와달사이트(우기자님) 이요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