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幸福)한 사람
새해 첫 날,
사람들은 일출(日出)을 바라보며
한 해를 소망해보지만,
나는 그 해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이 더 재미있다.
올핸 구름에 가려
평소보다 25분 늦게 떠오르는
새해 첫 해를 보며
무슨 소원(所願)들을 빌었을까.
아마도 복(福)을 받아
행복한 가정이 되었으면 하는
내용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수치에는
몇 가지 특징(特徵)이 있다.
행복은 일생 중 18세에서 34세 사이에
가장 많이 느낀다고 한다.
젊을 땐 힘이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젊을 때가 행복한지.
노인보다 행복할 소지는 많겠지만,
결코 젊음 자체가 행복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인생의 의미(意味)를 알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낸 그 때보다는
나이가 들더라도
존재의 의미와 사명을 알고
있을 때가 훨씬 행복한 생이 아니겠는가.
다음으론 많은 돈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 비해
훨씬 더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마음에 의지할 곳이 있다는 것은
그 어떤 보험(保險)보다 든든하기에 훨씬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돈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웃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이중성 인격자들에겐 돈이 복이 아니라
더 큰 저주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현대인들은
실용주의(實用主義) 인생관 복을
추구한다고 한다.
실용주의 복 개념은 편리성과
효용성에 있다.
요즘 사람들은 옳고 그른 것은
중요하지 않고 자신이 편하게 느껴야만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자신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효용가치성에 집중되어 있다.
자신에게 유익(有益)이 된다면 다른 사람이
죽든 말든 상관이 없다.
하지만 정말로 자신에게
편리하고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행복한 인생이 될 수 있을까.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실용주의 인생관이
인생을 더 불행하게
만들고 있음을 우리는 사회면을 통해
날마다 확인(確認)하고 있다.
진정한 복은
인생의 참된 행복이란
이러한 외적인 요소들보다
해를 바라보는 새 마음,
마음의 상태(狀態)에 달려있다.
마음 판만 바꾸면 세상(世上)이 바뀐다.
인격도 삶의 고상함도
마음에 달려있다.
옛 부터 좁은 집에서는 살 수 있어도
좁은 마음을 갖는 사는 사람과는
살 수 없다고 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편안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하고 무서운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 마음을 갖고 있다.
먼저 길가 같은 마음의 소유자다.
길처럼 반들반들하고
뻔뻔하고
닳고 닳은 마음이다.
뭘 들어도 심령에 변화가 없고,
뭘 겪어도 생활이 바뀌지 않고
운명에 사로잡힌 듯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 사람의 장점은 다른 사람에게
길을 만들어 줄지는 몰라도
자신은 어떤 씨도 내릴 수 없기에
아무 열매를 걷을 수 없다.
다음으론 돌밭 같은 마음이
좁은 사람이다.
겉은 부드러우나
속은 돌로 가득 차 있는 밭과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원도 밭이
돌이 많이 있지만,
팔레스틴 지역에 있는 돌은
우리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 많이 있다.
죄인들은 마음에는 많은 돌이 있다.
왜 그리도 잘 토라지고
잘 상처받는지,
가족이면서도 감당키 어려울 때가 많다.
그들의 마음은 돌처럼 굳어있다.
굳어지는 병은 무섭다.
인상이 굳어지고
손이 굳어지고,
관계가 굳어지고 인생이 굳어진다.
마지막으로 좁쌀 같은 마음은
가시밭 같은 마음이다.
메마른 광야인 유대에서는
가시떨기가 떨어져 거름 역할을 하는
가시밭이 기름진 땅에 속한다.
문제는 가시 때문에
더 이상 자랄 수 없다는데 있다.
인생에서 가시는 염려와 두려움이다.
아무리 열정적으로 일해도
염려와 두려움이라는 가시 앞에는
열매를 거둘 수가 없다.
이렇게 길가 같고 돌밭 같고
가시 같은
좁은 마음으론 절대로
행복(幸福)한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넓은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그것은 먼저 마음의 설정(設定)에 달려있다.
이제 뇌에 대한 연구가 상당히 진척되었다.
사람의 뇌에는 우뇌와 좌뇌가 있다.
큰 골인 좌뇌는 논리적 사고를 담당하고
우뇌는 감정적이고 예술적인 부분을 담당한다.
그러므로 모든 정보는 일반 우뇌를 통해
들어오지만 그것을 받아 논리적인
판단을 세우는 일은
좌뇌의 몫이다.
전에는 학자들이 우뇌를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것은 언어나
개념이 없는 다른 의식일 뿐이다.
우뇌는 좌뇌가 설정한 대로 움직인다.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다.
모든 일은 결국 자신이
설정한 대로 현실화된다는 말이다.
지금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그대로가 자신이다.
물론 우연스런 일이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설정대로
행불행한 인생이 만들어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스스로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환경 이전에
자신이 잘못 설정된 악(惡)한 개념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만약 자신을 희생자로
설정해 놓았다면 그의 우뇌는
희생자(犧牲者)에 대한 환경과 사람만을 찾고
다니기에 불행한 삶을 살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기가 나쁘다’
‘나는 노력(努力)해도 안 돼’
이렇듯 미리 자신의 뇌에 잘못 설정된
메시지는 신(神)도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 되고 만다.
이런 사람에겐
아무리 좋은 달란트를 갖고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렇게 환경과는 상관없이 설정에 따라
행불행이 결정되므로
우뇌가 바로 설정하도록 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重要)하다.
우뇌를 높이는 방법은
기본적으로 더 높은 차원(次元)의 말을
반복해서 들려주어야 한다.
생각에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따라 가도록
더 높은 차원의 것을 설정시켜야 한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행복(幸福)하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내가 복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셨던 축복들을
바른 설정을 통해
능동적(能動的)으로 누리라는 말이다.
시각장애인 강영우박사 말대로,
인생을 슬프게 만드는 것은
눈이 없는 게 아니라
바라보고 행동할 비전이 없다는데
있다고 했듯이,
현재 자신의 우울한 상황은
잘못 세뇌(洗腦)되어
내일을 내다 볼 꿈을 상실한데 있는 것이다.
좁은 마음을 넓힐 두 번째 방법은
바르게 설정을 했으면
설정된 대로
복 받을 행동(行動)을 해야 한다.
미우라 아야꼬는 동네에 구멍가게를 열었다.
사랑을 실천하며 살려고 노력했던
그녀는 항상 친절했다.
덕분에 손님들이 많아 장사는 잘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옆 가게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장사가 안 되어 걱정’이라는
말을 듣고서 그녀는
이웃과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자신의 가게 물건을 줄이기로 결정했다.
손님이 오면,
그 물건은 우리 가게에 없으니
옆 가게에 가서 사라고
돌려보낸 뒤, 얼마 있지 않아 옆 가게도
장사가 잘 되고 있다는 소리에
미우라 아야꼬는 신에게 감사(感謝)했다고 한다.
상대가 복을 받으라고 해서
복(福)이 굴러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바른 설정으로
복 받을 그릇을 먼저 준비했다면,
이제 복 받을 행동을 하고,
복 받을 좋은 습관(習慣)을 길러야 비로소
복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굴러들어온 복조차 오자마자
달아나 버릴 것이든지,
아니면 도리어 화(禍)가 될 수도 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자신에게 정직(正直)하게 물어보자.
‘나는 복 받을 짓을 하고 있는가.’
악하게 살면서,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서,
죄를 밥 먹듯이 하면서,
이웃에게 오만(傲慢)하게 굴면서
복을 빌지 않았는지.
독일의 막스 베버가 쓴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책을 보면 재미있는 자료가 있다.
그의 관찰에 의하면,
독일사회에서 무종교인들보다는
종교인들의 경제생활이 더 풍요롭고,
그 중에서도 또 신앙인들이
더 윤택하며 삶이
향상(向上)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었다.
막스베버 교수는 그 원인에 대해
간단하게 이렇게 표기했다.
‘그들은 듣고 배운 바를
실천(實踐)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믿고 바로 생활한다면
누구라도 건전한 부(富)는 약속되어
있다고 결론을 맺고 있었다.
주여,
저는 복 받을 그릇인지,
자신을 먼저
돌아보게 하소서.
벌써 인생 후반입니다.
이제
정신 차리고
당신께 갈 준비를 하게 하소서.
그럼에도 아직까지
세상 것으로 설정하여
스스로를 실패자로 여기거나,
이웃을 탓하는
어리석음에서 속히 눈을 뜨게 하소서.
오직
당신의 영(靈)으로
굳어진 돌들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갖게 하소서.
이것이 저의
가장 큰 기도제목입니다.
주여!
2009년 1월 18일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