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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소본능

유앤미나 2008. 4. 9. 15:23



귀소본능(歸巢本能)



올해도 어김없이 설 명절(名節)이 왔다.
해마다 설이 다가오면
어른이든 애든
가슴은 늘 설렘으로 가득 차있다.

올핸 긴 연휴 덕에 큰 정체는 없었지만 그래도
구간 곳곳은 차가 꼬리를 물고 있다.
매년마다 이런 일이 반복됨에도
사람들은 왜 고향(故鄕)엘 가려고 할까.

그 곳에는 어릴 적 그립고
소중한 추억(追憶)들이 담겨져 있기에,
기다림과 만남을 통해
가족과 이웃의 동질감을 경험하는
장소가 되기에 열 길 마다하지
않고 그렇게 가곤 한다.
그것은 고향을 향한
인간의 귀소본능(歸巢本能)이 아니겠는가.


귀소본능은
세상을 순환하게 만드는
중요한 자연의 섭리(攝理) 중의 하나다.

동물 특히 어류 따위가 태어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성장한 뒤,
새끼를 낳기 위해 다시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귀소본능은
학습이 아닌 신의 특별한
은총(恩寵)이다.

꿀벌이나 비둘기 그리고
제비나 연어 등의 귀소본능은
태양의 위치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일에 속한다.





여우도 죽을 때엔 자기가 난 곳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
이라는 말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고향을 그리워하고
아니 고향에 묻히고 싶은 마음을
감히 어찌 남대천을 떠난
연어의 회귀(回歸)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소기의 목적을 위해서
고향을 떠나 객지로 나가 살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인간이기에,

오죽하면 객사(客死)할
놈이란 말이 가장
심한 욕으로 생각하고 있겠는가.

이러한 귀소본능(歸巢本能)은
단순한 인간의 본능 중의
하나라기 보다는
사람은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는
자연의 섭리(攝理)가 있기에
그런 특별한 본능을 갖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돌아가야 한다는 운명(運命) 앞에
인간은 먼저 어머니를 통해
늘 연습하고 있다.

‘돌아간다’는 것은 사실 이미
한국적 정서의 가장
뿌리가 되고 있다는 것은
대중가요(大衆歌謠) 가사들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어떤 노래든지
사랑은 기본이고 그러기에
눈물이나 미련, 외로움 그리고 이별은
당연한 수순이며,
거기에 한 단계 업그레이든 된 단어는
어머니나 나그네 그리고 고향 등
거의 떠나고 그래서 슬프고,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감정(感情)표현이 대부분이다.


아들이 군대(軍隊) 가서 힘들 때마다
엄마가 가장 먼저 생각나듯,
사람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가 그립고 그의 품에
안기고 싶은 생각은 동서양을 떠난
인간 본연의 자세이기에,

어느 시인은 인간의 고향(故鄕)은
어머니의 자궁(子宮)이라고
표현했던 것은
처음 열 달 동안 있었던 그 곳이
평생 죽을 때까지 그리워
하다가 죽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바다 ‘해’(海)자가
어미 모(母)와 물 수(水)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마치 자궁 속의 물로 채워진 것처럼
사람은 언제나 어머니 뱃속의
따뜻한 자궁에 감싸지고 싶은 욕망이
있기에 물이나 바다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구약 요나 이야기에서
유래된 ‘요나 컴프렉스'라는 말이 있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을 때의
평온함과 안락함을 그리워하여 현실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다 큰 아이가 손을 빨고 있다든지,
아동기의 습관이나
퇴행적(退行的)인 증상을 보이는 모습들,
자신감이 없거나
폐쇄적인 성격을 보이거나
늘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들,

이들은 늘 부드럽고
따뜻한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이 건강한 사람에
비해 더 강하기에 그런 도피적인 모습을
더 쉽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특별한 사모곡(思母曲)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모태로의 귀환은
인간만이 갖는 꿈이요,
늘 마음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인간의 귀소본능적인 또 다른 모습이다.





다음으론 시오니즘(Zionism)을 통한
귀소본능(歸巢本能)의 모습이다.

냉전시대인 남북시대는 끝나고
경제적 코드인 동서시대가 오면서
전쟁의 종식을 염원했지만,
이스라엘 때문에 중동은 여전히
세계의 화약고(火藥庫)가 되고 있다.

그들이 이토록 아랍인들과 갈등(葛藤)을
빚는 것은 민족적인 시오니즘이라는
가슴의 뿔이 있기 때문이다.

시오니즘은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했던 고국(故國) 팔레스타인 시온으로
돌아가 다시 건설하겠다는 운동이다.

그들은 2천 년 전에 로마에 의해
그 곳에서 강제 추방당해 각국으로 흩어져
디아스포라로 유랑생활을 하면서,

핍박을 당하면 당할수록
고향(故鄕)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염원이 더 커지면서 시오니즘은
건국이념과 함께 수성(守城)의 의미가
더해져 더 큰 대립적인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시오니즘의 시작은 분명
이러한 방어적 입장에서 시작되었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중동 권에서
월등한 우위적 입장에서
번영(繁榮)을 꿈꾸는 새로운 시오니즘을
건설하고자하는 제국주의적
성격까지 내포하고
있는 것이 세계 평화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오니즘 본래(本來) 의도는
유대인의 존재라 할 수 있는
약속(約束)의 땅으로 되돌아 가고자하는
사모의 정은 어디까지나 종교적인
신조였기에 지금도
통곡의 벽에는 많은 유대인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다.

그들의 혼(魂)이 담겨있는
아니 이스라엘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군으로부터
공격당하면서 수많은 사람이
죽게 될 때 이 같은 비극을 지켜 본
이 성벽이 밤만 되면 눈물을 흘렸다고 하듯이,

2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은 그 때의
성전 함락을 슬퍼하고 그 회복을
기원하느라
통곡(痛哭)의 벽으로 가고 있다.

이젠 이스라엘은
어떤 연유가 되었든 간에
세계 초강대국이 되었음에도 그들 가슴엔
여전히 이상적인 시온(Zion)으로
돌아 가고자하는 사상은
인간이 본향(本鄕)을
향한 마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사람은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이 말을 달리하면
고향으로 왔다가 본향(本鄕)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말할 수 있다.

연어나 진돗개 그리고 비둘기들도 죽을 땐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귀소본능(歸巢本能)이 있는데 하물며
인간은 어떠하겠는가.

우리에겐 늘 나그네와 같이
어디론가 가고 싶은 나그네욕망이 있다.
그것은 이 땅에서 본향으로 가고자하는 본능이다.

나그네인생들은 타향살이가 고달프기에
어머니 품이 늘 그리운 법,
우리는 내 육신의 어머니를 통해
신의 품으로 안기고자하는 본능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향(故鄕)으로 돌아가면
날 반기는 사람을 기대하듯이,
이 땅을 떠나 내 본향을
갈 때도 날 반기는 이가 있다고
믿기에 각자 종교를 갖게 되는 요인이 될 것이다.





사람이 고향을 잃을 때
인생의 목적과 방향을 상실한 것처럼,
일상에 매몰되어 아무 낙이
없는 것은 어느 철학자 말이
아니더라도 당연한 이치(理致)이기에,

어거스틴은 이 땅은 천성으로
향하는 다리이므로
빨리 지나가야지 이곳에 집을
짓는 짓은 어리석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공(成功)한 인생은
다른 것이 아니다.

먼저 자신의 자아를 찾음으로
정체성(正體性)을 아는 일이요,

다음으론 이웃을 찾음으로
관계성(關係性)을 세워 나가는 길이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일은
인생의 주인을 알므로
현세와 내세를 확실하게 보장받는
본향(本鄕)을 찾는 일이다.





나는 이번 명절 때 가족들을 만나
좋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가족을 만나면서도
가슴 한 쪽엔 왠지
개운치 않았던 것은,

우리 멤버 중 어느 아버님이
위암(胃癌)으로
하늘의 부름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감사한 일은 명절 하루 전 날,
병원에서 기적(奇績)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 어르신이 드디어 인생의 본향을
찾으셨기 때문이다.


다시 강릉에 내려오자마자
병원에 갔더니 육신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식은땀을
흘리며 어찌할 줄
몰라 했지만,

하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갖고
이젠 가족들을 염려하며,
나름대로 그 날을
준비하고 계셨기에 안타까움
속에서도 안심이 되었다.





주여,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주신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에 기억(記憶)하라‘는
당신의 말씀대로 그 아들
이제 본향으로
가기 전
창조주를 찾았사오니,

당신의 아들,
꼭 기억하여 주시고
이젠 고통 없고
눈물 없는 그 나라에서
편히 안식(安息)하게 하소서.

인생은 절대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가
아니기에,

오늘도
전통으로 신비로
아니 윤리적인 눈으로만
세상을 보지 말고,

인생의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당신 앞에
서 있다는
종말론적(終末論的) 눈으로
보게 하소서.

2008년 2월 10일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


사진작가ꁾ 해와달(원강님) paulian님 서락샘님 크로스맵 lovenphoto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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