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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 연가

유앤미나 2008. 4. 8. 14:40



김장 연가(戀歌)


우리 집 11월 최대(最大) 이슈는
역시나 큰 딸 수능시험과
김장하는 일이다.

수능이야 이제 한시름 놓았지만,
김장은 단단히 준비(準備)해야 하는 것은
우리 식구들이 김치를 워낙 좋아해
네 식구가 먹는데도
40포기는 족히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올핸 배추 재배(栽培) 면적도 줄어들어
값이 더 올라 걱정을 했는데,
대형 마트에서 1인당 다섯 포기씩
특별할인가로 판다고해서 아내와 함께
배추 수송 작전(作戰)에 들어가 40분 만에
원하는 물량만큼 살 수 있었다.

김장은 겨우내 먹는 음식이므로
배추를 차에 싣는 내 마음은 이미
겨울을 다 준비한 것처럼
얼마나 뿌듯하고 행복(幸福)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이렇게 추위가 오기 전
겨울을 대비(對備)하여 여러 가지를 준비 한다.

옛날에는 김장과 함께
연탄을 광에 채우고
창문도 새 문풍지로 바꾸고
배추와 무는 땅에 묻어 두었다.

동물들도 미리 충분한 지방을 저장하고,
식물들은 낙엽을 통해 영양분을
뿌리나 줄기에 저장(貯藏)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겨울을 잘 준비(準備)해야만
새 봄이 올 때 짐승들은 다시 활동할 수 있고,
식물들은 줄기와 가지에 수분을
다시 공급 받을 수 있다.





이렇듯 세상 만물(萬物)들이
본능적으로
추운 겨울을 준비하듯이,

사람도 단 한 번밖에 안 오는
인생겨울을 철저히 대비해야 하는 것은,
그 겨울은 아무에게도 예고(豫告)해 주지 않고
순식간에 우리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고향이 어딥니까’라는 책에는
80년 인생을 하루 24시간으로 비교했는데,
그런 식으로 계산하니
25세만 되어도 아침7시가 되고,
60세가 되면 퇴근시간인 오후 6시가 된다.

그렇다면 나도 벌써
오후 3시 반이 되었으니 슬슬
퇴근(退勤) 준비를 해야 할 것만 같다.


김장도 입동(立冬)을 기준으로 준비해야
제 맛을 낼 수가 있듯이,
인생 겨울도 최소한 오후 3시가
넘어야만 제대로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인생 겨울 준비도
일상적인 겨울 대비용으로 준비하는 김장과
동일한 부분들이 많다는 것을 이번
김장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김장은 크게 세 과정(過程)을 통해 이루어진다.
먼저 커다란 배추를 소금으로 절이고,
숨죽은 배추를 뒤집어 씻고,
배추의 속을 넣은 후 숙성시키는 일이다.

먼저 소금에 절여야 김장은 시작된다.

배추는 속이 꽉 차고
보기에 좋아도
소금에 절여 순을 죽이지 않고는
제 맛을 낼 수 없다.

먼저 배추의 반을 뚝 잘라 칼질한 후에
소금물에 먼저 담그고 그 배추를
다시 사이사이에 굵은 소금을
뿌려 놓고 몇 시간 뒤에,

또 한 번 뒤집어 주어야
속까지 제대로 간이 들어 양념을
넣어도 잘 배여 들게 된다.


사람도 젊어서는 부피만 많이 차지하는
배추처럼 자신의 야망(野望)에
부풀려 폼 잡고 날 뛰다가,

인생 오후가 되면
문득문득 소금 간이 들어간 배추처럼
겸손(謙遜)한 모습이 보인다.

그 때야 비로써
소금 간이 들어간 배추모양
맛이 들어 사람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절여진 배추를 뒤집지 않으면,
한쪽 간만 들어 역시나 양념을 넣어도
맛을 낼 수가 없듯이,

나이가 들어도
뒤집지 못하고 한 쪽은 여전히
자기지상주의에 빠져 이웃을 배척한다면,
그 사람은 결코 인생의 겨울을
기쁨으로 맞이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신은 교만(驕慢)한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아시고
나에게 꼭 맞는 가시와 같은
소금을 주신다.

그 소금은
나를 부인(否認)하게 하고,
오히려 상대를 인정하고 섬기게 한다.

그 소금은
나를 겸손(謙遜)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곳마다 그의 영광이
드러나게 한다.





두 번째는 속을 넣어야 한다.

소금에 잘 절여진 배추를 갖고
이제는 온갖 정성으로
어우러진 양념을 배추 속에
골고루 바르는 일이다.

김장 속에는 여러 가지 재료가 들어간다.
보기도 좋고 맛을 좌우하는
고춧가루를 비롯해,
파와 마늘,
생강의 톡 쏘는 맛도 필요하지만,

젓갈과 굴을 통해 시원한 맛까지
어우러져 맛있는 김치가 된다.


인생도 여러 가지
재료(材料)가 들어가야 맛이 난다.

내가 단 것을 좋아한다고
김장에 설탕만 넣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인생을 달콤하게 하는 설탕 같은 일도
분명 필요하지만 그것이 꼭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때론 설탕보다
소금이 더 필요할 때가 더 많다.

지난주에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는
몸무게가 24kg에 불과한 아내를 지극한
정성으로 돌보는 키 작은 남편의
사연이 시청자들에게 감동(感動)을 주었다.

그들에게 인생이란
나무나 짠 소금 같았지만,
따뜻한 사랑으로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었기에,
그 소금은 오히려 깨소금보다 더 향기로웠다.





아직도 들어가야 할 재료들이 있다.
매운 고춧가루, 파, 마늘, 생강과 함께
명태나 생굴 등을 넣는다.

때론 인생이 고춧가루처럼 맵기도 하고
파와 마늘 그리고 생강처럼
톡 쏠 때도 있겠지만,

새우 젖이나 굴이 들어가
조화(調和)를 이루어 시원하면서도,
깊은 맛을 내는 김치가 되어
겨울이 와도 두렵지 않는 인생이 된다.


젊을 땐 단 맛에 빠지고,
기성(旣成)세대가 되면서부터는
매운 맛에 빠지다가,
중년을 넘기면 짜고 맵고 신 맛을 넘어,
시원한 맛을 내는 사람이 된다.

자신도 모르게 인생의 다양한 양념으로
잘 버무려져 맛깔스러운 인생이
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단것도 감사하지만,
맵고 짠 것도, 신 것까지도 감사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 김장의 마지막
숙성(熟省) 단계가 남아있다.

소금에 절인 채소에 소금물을 붓거나
소금을 뿌리면
국물이 많은 김치가 되고,
이것이 숙성되면서 채소 속의 수분이 빠져
채소 자체에 침지(沈漬)가 된다고 한다.

이 침지가 결국 어음변화를 걸쳐
김치가 됨을 알 수 있다.


옛 음식이 요즘 인기(人氣)가 있는 것은
숙성시킨 음식이 많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거의 다
마당에 김칫독을 묻어두고
겨울이 지나갈 무렵에 꺼내 먹었다.

독 속에 있었던 김치는 천연(天然) 땅에서
절로 숙성이 되어 발효 식품이
되어 맛도 물론이지만
영양도 절로 우러나왔던 것이다.





세상만사 기다려야 일이 된다.
인생도 사랑도 죽음도
김장을 담가 놓고 기다리듯,
어떤 일이든 잊고 기다려야만 맛이 든다.

때론 내가 이해(理解)할 수 없을 때가 너무 많다.
밀폐된 어두운 김치 독에
갇혀놓듯 나를
침묵(沈黙)하게 하시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들 때,

당시에는 몰랐지만 분명했던 것은
그 때에도 내 사상과 내 생의
미각이 예비(豫備) 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시간에 사랑이 발효(醱酵)되고 있었다.
사랑 안에 희락과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그리고
충성, 온유, 절제의 맛이
나도록 그렇게 그와 이웃이 기다려 주었다.





주여,

김장처럼
저도 인생 겨울을 위해
가시 같은 소금으로 절이게 하소서.

제 자랑과 경험(經驗)까지
완전히 절여져,
어두워진 눈이 열리고
당신의 속성이 나타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에게도 아라비안 3년을
기쁨으로 기다리게
하시어,

김장 겉 조리를
쭉쭉 찢어 더운밥에 얹어먹는
그 맛처럼 모두에게
맛있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2007년 12월 2일 첫째 주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


사진작가ꁾ해아달사이트(원강님) 투가리님 Lovenphoto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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