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트라의 영광(榮光)
요르단(JORDAN)은 이스라엘 국경에서
한 시간 만에 들어갈 수 있지만,
그 곳은 먼저 방문했던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비해 너무
황량(荒凉)하여 마음이 가질 않았는데,
‘페트라’를 보고선 나는 생각이 달라졌다.
페트라는 아랍계 유목민 나바티안 족들이
사막 한가운데 붉은 사암(砂巖)
덩어리를 찾아내어 만든
세계 유일무이한 바위로 된 산악도시다.
그 곳이 얼마나 흥미진진하던지,
중동(中東)을 돌아다니는 배낭족들이
묻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페트라에 가봤습니까?’
‘그 곳에 어떻게 갔습니까?’
수도 암만에서 ‘왕의 길’을 타고 가면
모세의 계곡(溪谷)이 나오는데
페트라는 그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페트라는 이미 고대
세계7대 불가사의 중 하나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오래 전엔 ‘인디아나 존스’ 영화를
촬영했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성경에는 ‘셀라’로 나오는데,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이곳을 통과하면
1주일 만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에돔족들이 허락하지 않아
느보산 쪽으로 우회하느라
40년이나 걸리게 했던 곳이므로
이스라엘에겐 한 맺힌 곳이 바로 페트라다.
페트라는 약 1km 이상
시크라라고 불리는 크고 높은 암벽이
마주 보며 좁은 협곡(峽谷)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바위로만 이루어진 길 양편엔
곳곳에 이름 모를 식물과 나무들이
분재처럼 꽂혀 있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모든 바위마다 연보라, 푸름, 분홍,
적색으로 채색된 무늬들이
너무 선명(宣明)하여
몇 번이나 발걸음을 멈추었는지 모른다.
더욱 특이(特異)한 것은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서 협곡 양쪽에
암벽 아래 경사도를 계산해서
수로(水路)를 만들어 물을 공급했다는
사실 앞에 저절로 무릎이 처졌다.
하지만 페트라의 진짜 히든카드는
거대한 바위를 깎아서 만든
‘알카즈네’ 사원에 있다.
방문객들은 좁은 협곡을 계속 따라가다가
새로운 막(幕)을 위해 가렸던 무대 막을
갑자기 연 것처럼 한 순간에 들어온
사원의 웅장(雄壯)함과
아름다운 전경에 빨려 들어가는 듯 했다.
물론 신화(神話)적 내용이지만
신과 죽음을 예찬한 여러 기둥과 섬세한
조각상들은 지금 장비와 기술을
갖고도 불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사원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역시 또 거대한 바위를
깎아서 만든 왕들의 동굴 무덤과
4천명 규모의 로마 원형경기장이 나온다.
로마 사람은 좋게 말해서,
정복하는 곳마다 문화 전령사 노릇을
시키지 않아도 잘 한 셈이다.
그 무덤 위로 올라가면
아론이 죽어 장사를 지냈다 하여
아론의 산(山)이라 불리는
‘호르산’으로 추정되는 산이 있다.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문화적 유산들을
볼수록 가슴에 남는 의문이 있다.
그 찬란했던 문화(文化)는
왜 어느 한 때만의 영광이 되었을까.
그 번성했던 부(富)는 왜 사라졌단 말인가.
페트라는 이전에 세계의 동서를 이었던
실크로드 교차지점으로 사막
대상로를 지배하여
번영을 누렸던 통상(通商) 도시였다.
후에 로마 식민지가 된 후에도
그 번영은 계속되었지만,
안타깝게도 로마의 멸망과 함께
수자원의 고갈로 이곳은
순식간에 폐허(廢墟)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로마와 함께
모든 것이 상실되면서 그 후예들은
사막 유목민(遊牧民)으로 살다가,
19c 초 어느 탐험가에 의해
묻혀있던 유적들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인류의 문명은 큰 강을 끼고 있으면서,
기후도 온화하고 기름진 토지를
지닌 곳에서 발상되었다.
하지만 대자연의 변화에 따라
되풀이되는 문명사의 격변은 인간이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자연의 질서(秩序)였다.
그러므로 인류문명은 수차례
멸망(滅亡)했다가
다시 진보되어 새롭게 건설되거나,
페트라처럼 뒤 늦게 발견되어 그 때를
음미해 본다 해도 분명한 것은,
해 아래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나는
페트라를 보면서 다시 한 번 절감했던 것이다.
솔로몬은 당시로선 최첨단의 문명을
이끌었고 친히 모든 부(富)를
경험했던 사람이었지만,
노후에 헛되고 헛되면 헛된 것이
인생이라고 고백(告白)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누가 무슨 일을 하든 무슨 환경에서
산다 해도 인생이
헛될 수밖에 없다고 한 것은,
사람은 이상하게도
지식이 더하면 근심도 많아지고
세상 지혜가 많을수록 번뇌(煩惱)도 많아진다.
그래서 재물을 갖고 원하는 것을 찾다보지만,
역시 바람을 잡으려는 일처럼 그 일도
공허(空虛)하게 느껴져,
이제는 쾌락(快樂)에 더욱 탐닉해 보지만
이것 역시 미친 짓처럼 느껴지기에
헛되고 헛된 것이 인생이라고 했던 것이다.
오늘 헬스장에서 보았던 어느
영화가 하루 종일 마음에 여운을 남겼다.
성(性)에 대해 첫 경험을 한 친구에게
그 느낌을 물어보자 주인공은
주저 없이 이렇게 답했다.
‘기쁘면서도 공허(空虛)하더라...’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어찌 보면 세상 모든 것들이 그녀의
첫 경험처럼 좋으면서도
왠지 허전하다는 말에 공감을 했던 것은
사람은 물질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는 얼마 전에
돈과 인간의 함수 관계에 대해 연구하면서
현대인의 풍요병을 '아플루엔자'라는
신조어를 통해 설명하였다.
감기(인플렌자)가 처음에는
몸에 별 영향을 못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만병의 원인(原因)이 되는 것처럼,
풍요(豊饒)병도 한 번 걸리면
모든 영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데,
곧 의욕이 약해지고
무슨 일이든 헌신할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매사에 지루함을 느끼는 증상들을
감기와 유사하다고 하여
감기와 ‘풍요함’(affluence) 단어를
합쳐서 ‘아플루엔자’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인류 문명이 멸망한데에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환경(環境)의 변화와
만족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의 욕망에 있었다.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
주체하지 못해 그 자체로는
어떤 감사나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다른 것을 찾다가 스스로 멸망을
자초(自招)했던 것이다.
해 아래 인간의 모든 상황이 신비스럽고
수수께끼 같을지라도 사람의 마음은
결코 만족을 줄 수가 없기에,
솔로몬은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낙이 없다 가깝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記憶)하라고 했다.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아니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기 전에
자신만을 위해 재물(財物)을 쌓아두는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말고,
돌아갈 그 곳에 부요하도록
사람의 본분(本分)을 바로 알고
미리 준비하고 대비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4년 전 유엔환경보고서에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대재앙은 적어도
100년이 지나야 할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불과 2년 전에는 10년 뒤라고
수정 발표했었다.
인류는 이러한 대자연의 변화에
순응해야만 살 수 있듯이,
개인적인 종말도
사람의 본분을 다하며
그 명령에 순응(順應)해야만
나와 가정이 살고 공동체가 살 것이다.
주여,
세상에 영원(永遠)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페트라의 영광도
솔로몬의 영화도,
들에 핀
백합화의 아름다움보다
못하다는 것이
이제 조금은 아는 듯 합니다.
제발 인생들에게
부록(附錄)으로 주었던,
부와 명예에 더 집착하지
않도록
당신을 기억하고
그 날을 기다리게 하소서.
2007년 11월 25일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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