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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라도 실타래를 풀자

유앤미나 2008. 3. 31. 13:51

이제라도 실타래를 풀자
갑자기 ‘인문(人文)학이 위기’라는
언론의 강타는 취업(就業)이
가장 큰 이슈라는 반증이 될 수 있다.
학문 중에 학문이요,
우리 사회의 지하수와 같은
인문학이 도대체 왜 갑작스럽게
찬밥신세가 되어야 했을까.
얼마 전만해도 우리는 민족성(民族性)을
전략적으로 강조해 왔는데,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경제성(經濟性)이라는
시대적 흐름 곧 정보화와
지식사회라는 새로운 지배구조
앞에 열세(劣勢)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공(理工)계는 인문학보다 훨씬 전부터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지 않았던가.
그러기에 지금은 영역(領域)을 떠나서
사람들이 생각한 것보다 몇 배 더
빠르게 변하는 시대적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결과들이 위기를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위기들은
기초(基礎)가 제대로 정립하지 못했다는
근본적인 원인 앞에 허탈감은 더해만 간다.
인문학은 지하수 수맥처럼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모든 학문의 뿌리가 됨에도 정작 그 기초가
얼마나 허술했던지 조금만 살펴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작품들의 완역(完譯)본이 별로 없다는 것과
대중적인 책을 내면 이단아로 취급당하는 학풍,
그래서 기초(基礎)학문을 전공하는 이들은
매년 감소하고 있는 현실적 예들이다. 
그러므로 인문학의 위기란 당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복합적(複合的)인 위기라는 점이다.

첫째로 사회(社會)적인 위기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사는 것을 전제(前提)하고 있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남을 이해하고 관용을 베풀므로,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바로 인문학의 기본정신이 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 정신이 효율(效率)과
시장만능주의에 맞서서
고전(苦戰)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곧 돈은 커녕 손실만 안겨주는
비인기(非人氣) 인문학과를 줄여 나가고,
기업에서는 연구비를 줄이고 있지만,
모든 사회의 기초(基礎)가 되고 있는
인문학을 점점 축소(縮小)한다면 희망적인
문명사회는 어찌 기약될 수 있으며,
또 국가 간 산업 경쟁력은
도대체 무슨 힘으로 이긴단 말인가.

그러나 원인 없는 결과 없다고,
오늘의 사회적 위기란 결국
대중화를 외면하고 또 변화하는
사회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기에
당연히 대책도 대중화(大衆化)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우리나라 인문학은 대학에만 존재할 뿐,
현실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고객이 알아주고 또 사 주어야
존재가치가 있듯이, 인문학도 단순히
고상한 학문이 아니라 꼭 필요한 도구가 되는
길만이 이 위기(危機)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길이 될 것이다.
전통적이고 획일적인 인문학이 아닌
다양성을 인정하는 가장 실용적인 동반자로
사회의 중심에 서서 사람들의 뿌리와
함께 열매를 맺도록 하는 일이다.

둘째로 인간(人間)의 위기이다.
인문학이란 삶의 본질을
탐구(探究)하는 인간다움의 학문이다.
그 인문학이 산업사회를 지나고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면서,
가치관(價値觀)의 변화에 따라
'휴머니즘'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과학은 인간의 위기를 해결하는 동시에
언제나 다른 위기를 몰고 왔다.
곧 물질문명의 급격한 변화와
비물질적인 정신문화의 부조화로 인한
가치관 혼돈과 방향상실감을
가져다 준 것이다.
풍요롭고 편리하게 사는 것도 좋지만,
더 근본적인 삶의 질문들 앞에서
답은커녕 혼란만 가중시켰던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황우석 교수의
과학적(科學的)인 능력은 충분히 믿지만,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인문학적인
철학 부재(不在)로 인한 안타까움은 더 크다.
한 사람의 인문학적인 소양
부족이 사회적인 파장은 물론이고
국가적인 손실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이러한 인간성 위기의 해법도 역시나 인간과
삶의 양식(樣式)에서 찾아야만 한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멸망(滅亡)하지 않았다.
인간은 영적(靈的)인 존재이므로
감성이 메말라 가면 다른 모든 것도
자연(自然)스럽게 멸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인문학의 가장 큰 덕목은 자기성찰(自己省察)이다.
디지털의 발전도 삶에서 출발하듯이
인간에 대한 연구 없이 그 어떤
제품도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
바로 그런 점에서 인문학은
사회적 프로그램에서 실제적인 활용이
요구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성공회(聖公會)대학교는
노숙자를 위한 재활프로그램에서
인문학에 관한 강의를 강화하므로 재활에
더 큰 효과가 있었노라고 보고했다.
모든 문제는 사람이 인간답게 못할 때
생겨나는 일이므로, 다른 어떤
것보다 본래의 자리를
깨우쳐 주는 일이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셋째는 과학(科學)의 위기에 있다.
현대사회에서 과학(科學)은
갈수록 더 큰 자리를 차지하지만,
더불어 인간성과 자연을 황폐화시키는
도구가 되었음을 부인할 사람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 없는 풍요(豊饒)의 불가능이란
과학과 산업화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사회적인 기아(飢餓)와 차별(差別)은
피해갈 수 없다는 현실적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을 떠나 존재할 수 없듯이,
인문학도 자연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고는 탁상공론에 그칠 뿐
풍요는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인문학과 과학은 대립적 관계가
아닌 동반적 관계이기에 인문학의
위기란 사회적인 위기요 또한
자연히 과학(科學)의 위기라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상생(相生)의 길에서 찾아야만 한다.
우리나라의 가장 고질병은 어느 분야든
배타적 입장만 고수할 뿐,
서로 협력하고 교류하는 것을 죽기보다
어렵게 생각한다는 현실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반목적이고
배타적인 자세는 결코 세계적 흐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눈을 떠야만 한다.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인문학은
시장 논리와 효율이라는 현실을 충분히
포용(包容)해야 한다는 현실적 과제를 위해서,
먼저 인문학 안에서도
학문간 통합이 필요하고 아울러
인문과 이공계간의 접목과 교류가 시급하다.
경희대학교에서도 처음에는 양방과 한방이 서로
무시했지만 지금은 서로 협력하여 가장
과학적으로 잘 접근시키므로
성공적인 결과를 얻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과학의 실용성(實用性)이다.
영문과 졸업생이 중세 영어만 연구하고,
실용적인 무역용어나 회화 한 마디
할 수 없다면 영어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겠는가.
마찬가지로 아무리
가치 있는 학문이라도 재미없는
인문학도 역시 무용지물(無用之物) 일 뿐이다.
장자는 ‘쓸모 있는 것도 쓸모 있고,
쓸모없는 것도 쓸모 있다’고 말했다.
곧 인문이든 자연이든 쓸모없는 것이 없기에,
모든 것을 유용한 존재가 되기 위해
적극적인 실용화 작업이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이다.

주여,
역사적으로 세기말(世紀末)이
그랬던 것처럼
위기란 언제나 조장되어 왔지만,
오늘의 위기란
경제적 수치로만 평가할 수 없는
인간 삶의 본질(本質)에
관한 위기입니다.
그것은
내일(來日)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또 전혀 준비할 수 없는
인간들의 한계적(限界的)인
위기들입니다.
그러기에 이제라도
사람들은
절대적 현실(現實)과
오만한 평가(評價)들을
내려놓고,
처음으로
아니,
원래의 형상(形象)이
회복되므로,
이 실타래들을
하나
하나
...
풀어 나가게 하소서.
2006년 10월 8일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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