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질문
100년 만의 폭설이라는 그 날,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체인도 달지 않은 채
큰 딸을 학교에 데려다 주려고 나섰다가
골목길 나오는 데만 한 시간 걸렸다.
간신히 딸을 학교에 데려다 준 후에 마음먹고
체인을 부착하는데 두 시간이나 씨름했지만 결국
그 체인은 끊어져버려 쓸 수가 없어서
억울하지만 새 체인을 사야만 했다.
그 날은 아주 가까운 분이 재판을 받는 날이라
마음이 더 초조했었는데 체인까지 말썽을
일으키자 협심증 걸린 사람처럼
가슴이 조여 오기 시작했다.
힘들게 법원에 도착하여 재판을 보면서
체인 없이 달렸던 내 차와 체인 없는 인생은
상당하게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정에 선 사람들은 대체로 두 종류였다.
체인 없이 인생을 달리다가 어느 순간에
그 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던 사람과
한 평생 성실하게 살았지만 억울한 일로
고소당해 졸지에 체인 없는 인생이 된 사람이다.
‘공공의적 2’에서는 검사가 참 좋은 사람으로 나왔는데
법원에서는 나쁜 사람으로만 느껴졌던 것은
피고의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채
결과만 갖고 법을 집행하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변호사가 멋있게 보였던 이유는
결과보다는 동기에 초점을 맞추어 간곡하게 선처해
달라는 피고의 대변자였기 때문이다.
우연이었다.
의도성 없이 감정에 이끌린 일이었다.
노모는 누워계시고 어린 애들은 할머니가 보고 있다.
실직 되어 울적했는데 친구가 유혹해서 호기심
으로 딱 한 번 피워보다가...이런 식이다.
연달아 몇 사건을 보면서 알게 된 일은
판사는 양측이 주장하는 말을 다 듣고서
다음 세 가지 질문을 꼭 한 후에
피고들에게 최후 진술을 말하라고 한다.
공소사실은 다 인정합니까?
죄에 대하여 반성합니까?
앞으로는 새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까?
나는 판사의 그 말을 들으면서
평소 체인 없는 인생을 살다가 마지막 그 날에
그 분으로부터 그와 유사한 질문을 받는다면
정말 큰일 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로, ‘인정합니까?’라는 질문이다.
나는 몇 년 전만 해도 교통법규로 경찰에 잡히면
무조건 처음엔 과오를 부정하곤 했었는데
이제는 경찰이 지적한 사실에 대해
인정은 물론이고 수고한다고 인사까지 한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다는 것은
죄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그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더 큰 유익이 된다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사람은 실수하지 않고 살수 없건만
어떤 사람은 자신은 평생 실수하지 않을 것처럼
남들의 잘못이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도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있다.
피조물인 인간은 불안전할 수밖에 없다.
구조적으로 볼 때 무슨 일이든 잘할 때보다는
실수할 때가 더 많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오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는 겸손한 모습이요
진정한 자기인식의 출발점이 되고있다.
이렇게 과실과 함께 우리는
또 불가능을 인정해야만 한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어느 스포츠용품 광고 카피지만
불가능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일까?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전지전능할 수가 없다.
살다보면 아무리 노력해도 넘을 수 없는 장벽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인생의 목표는 요원하기만 하고
삶의 여유도 사는 재미도 느끼지 못한 채
남과 비교만 하다가 분명 인생을 마감할 것이다.
도전하는 삶도 멋있지만
인정하는 삶은 더 아름다운 모습이다.
둘째로, ‘반성합니까?’라는 질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반성한다는 것이
죽기보다 더 힘든 모양이다.
아이나 어른이나 잘못된 점을 말해주면
한 순간에 원수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인간에게 반성처럼 좋은 쉼도 없다.
반성이란 거울을 보듯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이다.
게으르기를 체질적으로 좋아하는
자신에게 채찍을 가하고,
본능적으로 세상 유혹에 빠지려는
자신을 붙잡아 주는 가장 좋은 벗이 된다.
인간은 어리석고 약한 존재이면서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날마다 자신을 반성하므로 가꾸기 때문이다.
성장하는 사람은 수 없는 반성과 회개를
통해 자신을 극복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은총(恩寵)을 강조하다보니 삶과 분리된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진정 구원이란
교리적인 회개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생활 속의 회개 곧 반성과 참회는
더 요구되어진다.
날마다 발생되는 수많은 문제들은
환경적인 문제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로 앎으로 시작될 수 있기에
삶의 의미를 반성하는 철학을
‘지혜를 사랑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반성을 통해 자신을 바로 인식한 사람은
타인에게 언제나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섬기며 사는 것이다.
반성하므로 이렇게 이웃에게 긍휼함을 베푼 자는
마지막 그 날에도 긍휼함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이러한 반성함이 재판정에서 보이지 않았다면
판사는 분명 검사가 공소한 내용대로 아마도
무겁게 형량을 내릴 것이 분명하다.
셋째는, ‘새 인생을 사시렵니까?’라는 질문이다.
변호사 말대로 형편이 어려워서
순간 생각을 잘못해서 들뜬 마음에서 그런 행동을
했었다면 모든 것을 인정하고 반성한 후에는
변화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은총의 열매는 반드시 선행으로
나타나야만 정상적인 일이다.
변화된 삶은 생각을 바꾸는 일부터 시작된다.
생각 하나를 바꾸면 지옥이 천국이 된다.
많은 이들이 사람은 변화되기 어렵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결단된 새 마음을 방해하고 있지만,
7만 여명의 재소자들 중 약 30%는
교도소에서 신앙을 가지면서 생각이 바뀌어
원망의 삶에서 용서와 감사의 삶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남을 용서하지 않고는 변화의 삶은 불가능하다.
진정으로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반성했다면 이웃을 용서해야만 한다.
또한 생각 하나를 바꾸면 소유의 삶에서
존재의 삶을 가능하게 만든다.
돈은 이 시대에서 가장 위대한 신으로
등극한지 오래된 일이지만
소유는 영혼의 공허를 채울 수가 없다는
분명한 한계점은 어찌 해결할 것인가.
진정으로 변화된 사람은
돈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존재 속에
소유를 관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곧 돈에 따라 움직이는 인생이 아니라
존재에 따라 돈이 따라오는 하는 것이다.
주여,
체인 없이 미끄러운 세상을
얼마나 과속했는지
생각하면 할수록
...
저의 모든 것은
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인정합니까?
반성합니까?
새 삶을 사시렵니까?
지금도 울리는 당신의
그 음성을 듣게 하소서.
제 인생에서
확실한 체인은 오직
당신이십니다...
2005년 3월 7일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