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두 얼굴
80년대 ‘두 얼굴의 사나이’는
TV에서 무척이나 인기가 있었다.
평범한 과학자가 심각한 방사능에 오염되어
괴물 헐크로 변한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실제로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겠지만
헐크의 선과 악이라는 두 얼굴은
지금도 인터넷과 사람을 통해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인터넷은 짧은 역사 속에서
가장 빠르게 변신한 대표적인 문명의 이기물이다.
도스에서 윈도우로 바뀌면서
사람들에게 재미와 여러 유익을 주면서
자비를 베푸는 천사 같은 친구가 되면서도
범죄의 도구로도 쓰여 지는 현대판
야누스가 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서비스 업체의 이용약관에는
‘게시된 내용에 대해서는 모든 법적 책임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명시되어 있듯이,
정보의 바다와
정보의 공유라는 고유기능으로 인해
인터넷은 유리성이 되어가며
나만의 비밀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터넷의 한계요 두 얼굴의 모습이다.
요즘 ‘연예계 X파일’이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정상급 연예인 백여 명의 사생활이 실명으로
담긴 광고회사 문건이 인터넷을 타고
무차별하게 유포되고 있는 중이다.
회사 정보 유출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젠 개인적 신상공개를 통해
인격적인 테러가 본격화되고 있다.
가상시대답게 사이버 폭력이
얼마나 무자비한가를 실감하면서도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는 그런 짓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훔쳐보며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두 얼굴을 가진 인터넷은
우리 자신들의 현주소가 되고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헐크는 원래부터 이중적인 사람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변신이었듯이
사람들도 실존의 삶이 버거워
두 얼굴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지킬과 하이드,
이순신,
미국,
대통령,
그리고 나...
이들의 두 얼굴을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연약하면서도 이기적인 내 자신의
모습이기에 그런 것이다.
전통적인 기독교 삼위일체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었는데,
요즘에 와서는
‘나, 나 자신, 내 것’이 되고 있다고
우려하는 학자가 있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은
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선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 선한 사람들이란
자기 자신의 의(義)에 도취되어
자신은 절대로 악(惡)이 될 수 없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다.
작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낙태와 동성애 그리고 줄기세포 등과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보수적이었던
부시를 지지했던 사람들을 빗대어
하는 소리이다.
지엽적인 윤리적 가치로 인해
그것과 비할 수 없는 생명을 담보로 한
이라크전쟁에는 면죄부를 주었다는 것이다.
자리가 올라가면 갈수록
사람답게 살기가 힘들다고 말했던
학교 선배가 요즘 들어
더 보고 싶은 것은 이제 그 의미를
나도 알 것 같기에 그렇다.
이러한 극도의 이기주의는
개인을 넘어 집단 이기주의가 되어가고 있다.
이번 기아노조 간부취업 브로커 사건은
자신들만의 안위와 이익을 위해
나와 나 자신 그리고 내 것에만 관심 갖고,
더 중요한 너와 우리에 대해서는
관심조차도 없다는 것이
우울하게 한다.
‘당신은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요.’
오래 전에 어떤 이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무척 괘씸하게 생각했었는데,
이제 돌이켜보니
지금도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많은 사람들이 분명히 날 보고 얼마나
그렇게 말하고 싶었겠는가.
인터넷과 사람은
이렇게 분명 두 얼굴을 갖고 있다.
아니 세상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다.
문제는 두 모습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다루느냐에 따라
선(善)이 되기도 악(惡)이 되기도 한다.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일을 갖고도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뀐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 둘의 중간선은
다름 아닌 절제(節制)에 있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과할 때는 악이 되지만
적당하게 사용할 때는 선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술도 적정량만 지킨다면
심장과 혈관에 좋지만 적정량을 넘어서면
사망률을 상승시키는 것이 된다.
술은 악마인 동시에
천사의 얼굴을 갖고 있는데
절제의 미덕은 묘약을 선물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인터넷 중독, TV중독, 경마중독, 술중독자들이
줄지 않는 것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갈대
같이 유약한 존재이기에 알면서도
생각대로 안 되는 모양이다.
‘그 사람이 그럴 수가 있어?...’
절대 흥분할 일이 아니다.
어찌 자신의 분신(分身)을 보고 화를 낸단 말인가.
오히려 그런 사람을 만날 때마다
빨리 마음의 거울을 보고
신을 더 의지해야 할 것이다.
그를 통해
한계적인 나의 상황을 예측하고
단단한 마음으로 내일을 준비하는 것이다.
더불어 그 일로 님의 섭리까지
알 수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주여,
아직도
사람을 보고 실망하고
세상이 허무함을 느낀다는 것은
순진해서가 아니라
어리석게도 아직까지도
정확한 자신의 모습을 알지
못한 연고입니다.
두 얼굴에 실망하지 말고
그 모습에서
자신을 찾고 그리고
내일을 현실적으로 준비하게 하소서.
‘그럴 수도 있지’
안이숙님이 말했던 것처럼,
저의 포기가
당신의 시작이 됨을
이 종이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소서.
저는 진실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은혜를 베푸소서.
...
2005년 1월 23일 강릉에서 피러한이 드립니다.
*당분간 음악은 찬양연주곡으로 보냄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