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보다 향기를
교회를 새로 개척하면서
가장 큰 문제는
거처할 집을 얻는 일이었는데,
감사하게도
지인이 ‘원룸’을 소개해주어
관리 조건으로
이 일이 쉽게 풀렸다.
원룸 관리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조경관리’가 들어있다.
겨울엔 눈만 치우면 되지만
봄이 되자 그 일은
들풀과의 전쟁을 통해 만만치 않음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올핸 특히 평균 반도 안 되는
강수량으로
대지는 누렇게 타들어감에도,
원룸 주변에 있는
들풀들은
물을 안 주어도 잘도 자라났다.
고구마 순 사이로
삐져나오는 풀을 날마다 뽑아 줘도
다음 날
또 다른 얼굴들이
아무 두려움 없이 날 보고 웃는다.
평소 내게
들풀이란 존재는 그냥
‘무성하게 잘 자란다.’하는 정도였지,
그들이
어떻게 가뭄을 이겨내고
도대체 생명력을 어떻게 유지하는지
관심조차 없었지만,
작은 규모지만
새 터전에서 농사를 다시 지으면서
하루만 지나도
부쩍부쩍 자라나는 들풀을 보며
문득 들풀과
인생을 비교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들풀은
눈에 잘 뛰는 곳엔
가장 먼저 관리 대상이 되므로
보이는 대로 뽑혀나가
찾아보기 쉽지 않겠지만,
후미지고
사람의 손길이 미쳐 닿지 않는
뒤편엔
너무도 당당하게 유실수처럼 자연스럽게
둥지를 틀고 있기에 간혹
무슨 꽃인가
할 정도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다.
그들은
아무리 척박한 곳이나
어떤 음지라도
환경에 굴하지 않고 그저
자신에 처한 조건에 따라 적응하여
변신해 가므로
생존해 나가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들풀 하나도
목마름을 이겨내고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토록 애를 쓰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들풀과 유사점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가끔
우리는 그들보다 못 할 때가 있다.
곧
하찮은 들풀도
자연의 이치에 따라 본능적으로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그토록 최선을 다하건만,
인간은 그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만물의 영장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조건 앞에서도
쉽게 무너질 때가 많다.
정말 죽을 정도로 어려운 사람은
말이 없다는데 사람들은
입만 열면, ‘죽겠다’,
‘못 살겠다.’라는 소리를 노래처럼 하고 있다.
들풀의 근성을 닮아
태양의 강렬한 뜨거움도 견디면서
어이없게도
감정의 따스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므로
들풀 같은 존재로
전락할 땐 인생이 뭔가 싶다.
왜 많은 시인들은
이전부터
인생을 들풀처럼 살라고 말했을까.
들풀은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태양이 내리쬐면
당연하듯이 다 받아주면서
정 견디기 어려우면 잎을 말려
잎사귀까지 포기하면서
오로지
생명을 유지하는데 총력을 모은다.
하지만 인생은
생존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들풀이 느끼는 것과 비할 수 없는
수많은 인생의 바람들이
무한히 허공을 맴돈다.
그 때마다
과거 상처에 매이지 말고
미래 희망에 묻지 말고
오로지
오늘 이 순간에
기쁨은 기쁨으로
슬픔은 슬픔으로 대하여
처음
무소유한 심령처럼
살아갈 때,
어느 순간부터
진실 앞에 거추장스러운 것을
벗어 버리고 나로 인해
진정한 이웃이 있는 세상이 만들어진다.
대부분
들풀들은 하루살이처럼
한해살이 풀들이다.
6월을 마감하는 이 때에
사람으로 치면
벌써 최소 마흔 살은 먹은 셈이다.
그런 들풀들이
누굴 탓하며
무엇을 불평하겠는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들풀들의 생존 지혜를
배워야만 한다.
물은 막히면 돌아가듯이
들풀은 모든 환경에
적응하며
생의 목적은 직접 말할 수 없지만
자연의 이치에 따라
때를 기다리며
오늘 할 일을 할 뿐이었다.
어떤 남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25년 동안 열 네 번이나
직업을 바꿀 정도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때
문득 장구를 치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사물놀이 패를 따라다니며
태평소를 부를 때
모두가 미쳤다고 손가락질을 했다.
어느 날 집 화단에 흐트러진
장미를 보며 향을 맡으려
코를 가까이 댔는데,
꽃의 향기는
장미 뒤에 숨어있던 찔레꽃에서
흘러나옴을 보고
<찔레꽃>이라는 시를 쓴 후
음을 붙이고 감정을 실어
노래를 부르니
무대마다 관객이 넘쳐났다.
‘못난 찔레꽃이 내 인생을 바꿨네요.’
그가 바로 소리꾼
장사익였다.
장사익처럼 들풀은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없기에
사람들에게 들풀이라
불림 받지만
뽑혔던 들풀은 땅에 눕혀서도
뿌리를 땅으로 향하며
마지막까지
자신을 표현하는 그들을 어찌 들풀이라
이름 짓겠는가.
알고 보면
아름다움과 비할 수 없는
생명에 대한 진한 향이 있기에
들풀인생도
소중한 이름이 있다.
이 땅에 태어나
나로 인해 누군가가 기뻐한다면
누군가가 나로 인해 함께
울 수 있다면
꽃과
비할 수 없는
그들만의 더 위대한 존재이유가
있기에,
오늘도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살아야 할
수없는 이유와 사명이
광야에선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실한 향기에 있음을 알기에
내가 하는 일이
가치가 있고
마지막 그 날도 두렵지 않은 것이다.
2017년 6월 27일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드립니다.
사진허락작가:하누리님, 우기자님, 이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