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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좋은 것 치고

유앤미나 2015. 9. 13. 17:32

몸에 좋은 것 치고 내가 좋아하는 TV프로 중 하나가<나는 자연인이다>이다. 나는 그 방송을 보면서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대부분 아픈 상처들을 안고 산 속에 들어와 혼자 살고 있는 그들이 먹고 있는 음식들은 조미료를 배제하고 자연 그대로 조리해 먹고 있었다. 아울러 출연자들이 조리하면서 한결같이 했던 말은 ‘몸에 좋은 것 치고 맛있는 것 봤어요?‘ 이었다. 맞다. 유독 쓴 맛을 내고 있는 먹거리 중 몸에 좋은 것들이 많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익모초, 고들빼기, 도라지, 신선초, 씀바귀 등이 쓴맛을 가진 채소로 오랫동안 몸에 약이 된다고 믿었고 또한 많은 효험을 얻었었다. 어느 지인은 매일 축구에 빠져 살 정도로 건강했는데, 갑작스레 찾아 온 간경변증은 식도정맥류와 간암이라는 합병증까지 만들어 생을 포기할 정도로 힘든 삶을 살고 있을 때, 친구로부터 ‘여주’를 소개받아 복용하기 시작했는데, 1년 만에 깨끗하게 암으로부터 치료함을 받았다고 한다. 필리핀 사람 중 약 10% 정도가 당뇨환자인 것은 천성적으로 그들은 단맛의 과일과 채소를 즐기는데 의사들은 꼭 혈당조절을 위해 약과 함께 ‘여주’를 처방한다고 한다. 그만큼 ‘여주’를 신이 주신 채소라고 극찬하는 것은 거친 모양새만큼 특유의 쓴맛을 내지만 2주 정도만 먹어도 변화가 오기에 우리나라에서도 요즘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쓴맛 채소가 몸에 아무리 좋아도 먹기가 힘들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쓴맛 나는 어떤 것이든 멀리하려고만 있다. 우리가 쓴맛을 느끼는 것은 ‘콜레시스토키닌’이라는 생체물질인데 이것은 몸에 흡수가 안 될 정도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역으로 식욕 억제제나 비만 치료제로 이용하기까지 한다고 한다. 물론 쓴맛 역시 너무 과하면 위장장애도 일으킬 수 있고 몸도 차가워지게 하는 부작용도 있지만 쓴맛이 싫다고 단맛 나는 것만 찾다보면 필리핀인처럼 당뇨환자가 늘어나고 세상은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동성애까지 허용하자는 법을 주장하듯, 어느 유명 쉐프 트레드 마크처럼 세상은 갈수록 달달해질 수밖에 없다. 몸을 넘어 정신을 넘어 영혼까지 달콤해 지고 있다. 그럼에도 세상이 아무리 달달해도 ‘쓴 것은 약이고 단 것은 독’이라는 개념은 오랫동안 인간사회를 지배해 왔지만 그 큰 의미조차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곧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라는 속담처럼 모든 영역에서 공통되는 철학도 좋은 결실을 위해선 쓴 맛과 같은 고통이 요구되어 왔다는 진리는 변할 수가 없었다. 상처가 났을 때 소독약이나 불을 가져다 대신 설탕을 갖다 붓겠는가. 고대에 사혈은 거의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해 온 처방이었는데 지금도 애용하고 있는 방법 중의 하나다. 가끔 단식을 하면 몸 안의 모든 독소가 빠져 나간다는 상식은 다 알고 있다. 새벽에 찬물로 샤워하기 등 몸에는 쓴맛일지 모르지만 실상 몸에는 양약이 되는 비법들은 셀 수 없이 많이 있다. 물론 쓴맛과 고난만이 인간에게 복을 가져온다는 잘못된 종교적 관행도 무시할 수는 없다. 속죄와 천국의 확신을 위해 고행을 자초하여 일부러 채찍과 쇠사슬로 학대하므로 쓴 맛 같은 인생을 자초하는 것은 결과 또한 아름다울 수 없기에 단맛만을 찾는 이만큼 쓴맛을 일부러 찾아가는 짓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마치 고통을 통해서만 더 나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보상적인 심리는 단맛에 길들여진 것처럼 거의 모든 우리 일상생활에 침투해 있는 것 같다. 밑도 끝도 없이 ‘너도 고생 해 봐야 세상을 안다.’ ‘너도 고생 해 봐야 사람이 된다.’ 이런 식의 관념을 갖고 있는 어른들은 쓴맛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왜곡시켜 중세 때처럼 고통을 통해 복을 얻으려는 단맛보다 더 무서운 쓴맛은 분명히 배제시켜야 한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너무 과하면 오히려 독이 된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처럼 쓰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약이나 인생은 적당한 쓴맛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치 커피의 적절한 쓴맛은 다른 맛들과 어울려 맛을 더 좋게 만들 수 있지만 너무 쓰기만 한다면 커피 고유의 좋은 향과 맛을 완전히 가리기에 맛있는 커피를 즐길 수가 없다. 인생은 커피처럼 쓴맛도 보고 단맛도 보면서 자연스럽게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아가기에 모든 생(生)은 멋과 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생의 초보자는 달면 삼키고 쓰면 무조건 뱉어내는 감탄고토(甘呑苦吐)라면 누구 말대로 인생의 3/4을 모른 채 생각 없는 아이처럼 생존할 뿐이다. 원래 커피 원두 맛은 쓰다. 로스팅해서 원두를 씹어보면 쓴맛과 구수한 맛의 황금비율을 감지할 수 있기에 커피는 마실 때마다 다르기에 새로운 기대를 갖게 하는 마법의 차다. 초콜릿 원료인 카카오 콩도 무지 쓰다. 쓴맛이 베여있기에 우아한 초콜릿이 되는 것이지 단맛만 있다면 단순한 설탕에 불과 할 것이다. 모든 약초도 마찬가지다. 쓰지 않으면 몸에 좋을 수가 없다. 모든 음식도 쓴맛이 받쳐 줘야 본래 고유의 맛을 음미할 수가 있다. 여자는 남자의 반대가 아니라 여자가 있기에 남자가 온전해 진 것처럼 쓴맛도 단맛의 반대가 아니라 좋은 맛을 내게 하고 제 맛을 내게 하는 맛의 절대 지존이라 할 수 있음에도 아이처럼 단것만 좋아한다면 당뇨가 문제가 아니라 음식의 맛도 모르고 인생의 참맛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이 생각 없이 살아갈 뿐이다. 고생 끝에 낙이 찾아온다는 고진감래(苦盡甘來) 사자성어처럼 인간에게 소망을 주는 단어도 드물다. 인생은 짧음에도 얼마나 크고 작은 좌절을 겪으며 살아가는가. 하루에도 수없이 당장 모든 것을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었을 때가 많았지만, 이러한 삶의 고통은 계속적으로 연속되고 있기에 우리는 그냥 포기하든지 아니면 사유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선택해야만 한다. 이 고통이 나만의 아픔이 아님을 사유한다면 진실로 타인을 긍휼로 여길 줄 알아갈 때 오늘의 좌절은 자신의 역사를 갖게 한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오늘은 어제의 반복이 아니라 오늘은 내일을 위한 하루가 되기에 겨울을 참고 기다린 나무처럼 인생의 봄에 새순을 틔우리라는 소망은 결코 꿈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지기에 쓴맛의 현실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2015년 9월 13일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 드립니다. 사진허락작가ꁾ포남님, 우기자님, 이요셉님
^경포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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