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외로워서
지난 달 한 고시원에서
이모(32)씨가 침대에 엎드린 채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3년 동안
방문객 한 명도 없는 채,
누구와도 함께 밥 먹은 적도 없었기에
고시원 식구들도
죽기 전까지
그의 이름이 뭔지도 모를 정도로
오로지 홀로 방에
들어와
외로움이 북받쳐 자살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요즘 불경기라
건설 경기는 더 얼어붙었음에도
신기하게도
동네마다 짓는 건물은
대부분 원룸 자취방들이다.
1인 가구의 급격한
증가와 함께
고독사 징후는 앞으로
더욱 두드러질
전망이다,
그들은
홀로 사는 서러움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여러 요인으로
혼자 살아가면서 인연을 맺지 않으려
하기에
우울증에다
정신적 무력감은 더욱
쌓여만 가고 있다.
현대인은
1인 가구가 아니더라도
공통적으로 공감하는 것은
외톨이,
소외 그리고
홀로 있는 느낌이라고
표현한다.
갱년기 증세처럼
분주히 손이 움직임에도 왠지
텅 비어 있는 느낌과
고독감은
무엇으로 다스려야 한단
말인가.
북한사람들은
남한 사람에 비해 병 고치기가
쉽다고 한다.
그들의 병은
대부분 너무 못 먹어서
생겼기에
조금만 잘 먹이기만 해도 자연스럽게
고칠 수 있지만,
남한 사람들은 반대로
너무 많이 먹어서 생긴 병들이라
고치기가 어렵다고 한다.
못 먹을 땐
배불리 먹기만 하면
만사형통인 줄 알았는데,
많이 먹은 후에야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많이 먹다 보니
온갖 병에 더 노출될 뿐
아니라 생각지 않는 또 다른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이 들어
못 먹어 고민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외로워서 견디질 못한다.
배는 채웠는데
혼자 살지 않고 같이 살아감에도
가슴에 담겨진
공허감, 권태감을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기에
오늘도 길 잃은 새처럼
방황한다.
언제부턴가
인터넷에 <우츄프라 카치아>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퍼지기 시작했다.
이 식물은 결벽증이 심해서 누가
만지기만 하면 말라
죽어 버린다.
그렇지만
같은 사람이 지속적으로
만져주면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난다고 한다.
알고 보니 이 식물은
세상에 실존하고 있는 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꾸며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왜 감동을 주고 있을까.
마치 어떤 사람에 대한 실상을
알고서도 계속 사랑하는
이유는 그 허상 속에서
자신의 위선을 보았기 때문인 것처럼
비록 가상의 스토리지만
알고 보니
그 꽃은 결백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너무 고독해서 죽는다는
그 점이
자신과 많은 공유점이 있었기에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는 어느 때부터인가
돈 버는 일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되었고,
외모까지 철저히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한 상품성을
높이는 수단이 되는 사이
심령은 말라가고
인생의 소중한 가치들은 힘을
잃고 슬픈 자아상을
지닌 채
생각 없이 살아간다.
주변에 많은 사람이 있음에도
정을 나눌 수 없다는
극한의 외로움과
끊임없는 이기적 삶의 방식들이
자신을 더욱 외로운
고슴도치가 되게 한다.
모두가
앓고 있는 이러한 외로움을 무기로
온갖 서비스업종들은
불황임에도
계속 성장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외로움을 극복할 수 없기에
근본적인 방법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 ‘소외’라는 정신적 질병은
고독과
외로움이라는 원초적 고통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생각해 볼 일은
외로움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몸과 그림자는 하나이듯이
사람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는
통과 의례와도
같은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
어쩜 이 의식들을
제대로 지나가지 않으면
일평생 두려움과 분노, 우울증이라는
거짓자아 앞에 무릎을 꿇게
될지도 모른다.
외로움은 본시
사람에 대한 잘못된 기대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듯이,
외로움은 어쩜
이기적인 인생의 여정 속에서
당연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본시 사람이니까 외롭다고
자위해보지만
생각해 보면 외로움은
또 사람 때문에
생겨난
바이러스이기에
외로움이 온 몸을 감쌀 때마다
사람에 대한 기대를
버리면
버릴수록 좋다.
흔히
정치권이 가장 무정하다고
말하지만
어찌 정치권만
무정하겠는가.
세상이 다 무정하다.
인간은 철저히 이기적이고
무정하다.
사람은 의지하고
기대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고
용납할 대상임을 기억하고
실망스러울 때마다
홀로 있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모든 기대를
내려놔야만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국인이
머리가 아픈 가장 큰 원인은
생각과다에 있다.
두통이 올 땐
생각을 줄여야 하듯이
외로울수록
자신을 묶고 있는
생각을 내려놔야 한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이 더 많다.
자기 생각에 빠질수록
억울하고
비참하고
바보같다는 생각 밖에 안 든다.
벨트마냥 허리를 두르고 있던
뱃살도 살포시
내려놓아야 하듯이,
뱀처럼 머리를 감싸고 있는
기가 막힐 생각들을
내려놔야만
외로움에서
벗어나 일상의 행복이
가슴에 새겨진다.
나이가 들수록
꿈은 갖데
욕심은 내려놔야 우울하지 않고
외로워도 견딜 수 있다.
내 안의 욕심을 비운만큼
이웃이 들어온다.
부버의 <나와 너>에서
말하듯 ‘나와 너’는 인격적 만남이
되어야 함에도
‘나와 그것’처럼 물질적 관계가
되어가기에
관계는 병과 상처를 안겨준다.
문제는 이 두 관계 형성에 따라
삶의 양상이 달라지기에
부버는 더불어 살아가는
인격적인 관계형성을 통해서만
참다운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역설했다.
나도 외롭고 약하지만
나보다 더 외로운
소외된 이웃과 함께해야
<나와 그것>이
<나와 그>가 되므로
인생의 멋과 맛을 알고
외로움 속에
사랑이라는 새순이 돋아
눈을 떠도 두렵지 않은 것이다.
주여,
이 시대는
모든 것이 풍요로우나
외로움을
어찌하지 못해
방황하고 있습니다.
욕심과 함께
사람을 기대하므로
불안과 소외된
실존적 존재로 타락하면서
존재의 근원인
당신과
존재의 목적인
이웃과 상극이 되므로
더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나를 떠나지 않으신 주님,
나의 작은 섬김에도
고마워하는 이웃에게
빈자리를 채우는
존재로 살아가게 하소서...
2014년 4월 3일에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 보냅니다.
사진허락작가ꁾ우기자님, 포남님, 이요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