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책을 말리던 날 저녁, 다섯 살부터 열 살까지 내가 가지고 놀던
물건을 담아 둔 상자가 나왔다. 뭉툭해진 붓, 쓴다 남은 먹,
호박구슬, 깃털, 등잔 장식품, 송곳 자루, 바가지 배, 싸리나무 말 등속이
책상높이 만큼 쌓였다.
간간이 기와 조각도 좀벌레 사이에서 나왔다.
모두가 내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물건이었다.
그것을 보고 슬프거나 기쁘지는 않은데,
어쩐지 문득 낡은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오늘 이만큼 성장한 내가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겪은 변화가 새삼스럽게 되살아났다.
거기에는 손바닥만한 책 10여 권도 있었다.
'대학' '맹자' '시경''이소' '진한문선' '두시' '당시' '공씨보' '석주오율'은
내가 직접 비점(批點)을 찍은 책이었는데 모두 흩어져 온전하지 못했다. '
맹자'는 4권으로 나누어 엮었는데 그것 역시 한 권이 없었다.
그것을 보고 있으려니 어릴 적 일이 떠올랐다.
나는 글씨 쓰기를 좋아하여 언제나 입에 붓을 물고 다녔다.
측간에 가서는 모래 위에 글씨를 썼고, 어디에고 앉으면 허공에 글씨를
썼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분패(粉牌) 위에 글씨를 쓰다가 벌거벗은
채 기어서 그 위로 올라갔다. 무릎과 배꼽에서 흘러내린 땀으로 먹
물이 만들어졌다. 그걸로 여기저기 닫치는 대로 임모(臨摹)하여 병
풍이고 족자고 가리지 않았었다.
병자년에 청교로 집을 옮긴 뒤 청교의 집 벽에는 하얗게 남아 있는
곳이라곤 없었다. 선친께서는 매달 종이를 내려주셨는데 나는 날마다
종이를 잘라 책을 만들었다. 책의 폭은 손가락 두 개 크기 만하여 두 질
을 함께 놓아도 불면 날아갈 정도였다. 책 한 권이 완성될 때마다 이웃
집 아이들이 달래서 가져가기도 하고, 묻지도 않고 나꿔채 가기도 했다.
그래서 읽은 글을 반드시 두세 차례 뽑아 써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에 키는 해가 갈수록 한 자씩 커가고 책의 크기도 한 치씩
커갔다. 아홉 살 때 이 '맹자' 책을 만들게 되었다. 이 무렵 이보다 작은
책은 나무상자를 채울 정도가 되었었다.
내가 열한 살 되던 해에 선친께서 돌아가셨다. 그 뒤 묵동으로 이사하
였다가 또 필동으로 이사하였고, 또 묵동 셋집으로 옮겼다가 재차 필동
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5, 6년 사이에 책들은 거의 다 흩어져버려 내 어린
시절은 더 이상 더듬어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이 책들이 소중하지
않겠는가?
이에 잘못된 글자는 고치고 장정은 다시 잘 하였다. 그리고 잃어버린 부분
을 채워 쓰고 나서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내 옛 모습이다."
옛 물건은 낡은 그대로의 모습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폭이 좁은 책을 매다 글자의 뿌리를 갉아먹게 되었다.
이 날 어머니는 장롱 속에서 팔뚝 반 만한 행전 모양의 푸른 비단을 꺼내시
면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세 살 적 저고리란다."
나는 이 책을 보이며 말씀드렸다.
"있는 것이 없는 것이나 진배없네요."
그러자 친구가 이렇게 농을 걸어왔다.
"소뿔에 책을 걸고 공부한 것까지야 좋지만 이밀은 소를 너무 무시했지?"
그 말에 나는 이렇게 대꾸하였다.
"분서갱유하던 그 날에 책을 숨긴 것이 복생의 입을 믿는 것보다는 낫지."
*산문집-'궁핍한 날의 벗' 중에서
*조선후기 실학자. 북학파 문인들과 교유.
저서- 북학의. 정유집. 정유시고. 명농초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