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스크랩] 유인경 - 난 유치한게 좋다

유앤미나 2012. 7. 26. 16:52

난 유치한게 좋다 

 

                                                                                                                                                  유인경

 

"나이값 좀 해라!”
내가 친구들에게 가장 자주 듣는 충고다. 중년 여성답지 않게 늘 푼수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스무살 무렵엔 지금의 내 모습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흔이 넘으면 신사임당 같은 현모양처는 아니더라도 우아한 완숙미를 자랑할 줄 알았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과일처럼 무르익는 줄로만 생각했다. <남과 여>의 여주인공 아누크 에메처럼 새파란 젊은 여성들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그윽한 미소로 누가 무슨 말을 해도 흥분하지 않고 “아, 그렇군요”라고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는 그런 여성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푸릇푸릇한 시절, 난 미모를 자랑하지 못했으므로 나이들어 원숙함과 포용력으로 승부하리라 야무진 다짐을 하곤 했다. 그런데 과일이 아니어선지(?) 저절로 무르익질 않고 있다. 나이든다고 완숙함을 자랑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유치해지고 있다. 성격이나 취향이 모두 그렇다.

불혹의 나이에도 난 여전히 만화책을 보고 아이들이나 먹는 과자를 즐겨 먹는다. 텔레비전 광고에 새로 등장한 과자류는 꼭 사먹어봐야 직성이 풀린다. 남들이 유치하다는 코미디 프로를 보면서 푸하하 웃고,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 콧물 흘리며 울기 일쑤다. 전엔 인터뷰 도중 슬픈 사연을 듣다가 눈물을 펑펑 쏟아 완전히 ‘미저리’를 연출하기도 했다(마스카라가 엄청나게 번져서…).

초등학교 6학년생인 딸아이에게 사주는 선물도 내가 좋아하는 인형이 대부분이다. 수시로 그애가 먹는 걸 빼앗아먹고 예쁜 편지지나 메모지를 보면 달라고 졸라 딸아이와 다툰다. 직업상 각종 신문·잡지를 보는데 10대 대상의 잡지도 빼놓지 않고 탐독한다. 그 잡지에 실린 ‘이달의 별점’ ‘내게 어울리는 이성은 어떤 형일까’ ‘장래 어떤 직업이 적당할까’ 등등의 심리 테스트도 열심히 해본다. 그 결과는 ‘당신에겐 지적인 남성이 어울린다’거나 ‘이달엔 실연운이 있으므로 조심하라’ ‘과학자가 적성에
맞다’ 등 직업이나 남편이 모두 결정나버린 나에게는 도무지 해당사항이 없는 것들인데도 난 매번 흥분한다.

직장에서도 나의 유치함은 잘 감춰지지 않는다. 회의 시간에 낙서를 일삼는가 하면, 우리 신문사에서 가장 잘 떠들고 크게 웃는 사람 명단을 적어내라면 분명 1위를 차지할 거다. 옆 부서에서 간식이라도 먹으면 꼭 달려가서 얻어 먹고 온다.

얼마 전 한 모임에 나갔다. 30~40대 전문직 여성들이 모인 자리였다. 옷차림과 액세서리, 말투며 태도 등이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중간 색조의 단아한 투피스나 슈트 정장, 진주나 다이아몬드 목걸이나 귀걸이, 두드러지지 않는 세련된 디자인의 핸드백과 구두, 적당히 웨이브진 헤어스타일. 그리고 대부분 ‘부티’나는 명함케이스를 꺼내 명함과 함께 입가에 25도 각도의 미소를 교환했다. 목소리도 절대 높지 않았고 대화 내용도 품격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대학원 석사 이상의 고학력이었고 수시로 전문용어를 구사했으며 실제론 모르지만 겉보기엔 절대로 음담패설을 늘어놓거나 ‘○○부인 바람났네’ 류의 비디오는 안 볼 분들 같았다. 웃음소리 역시 ‘호호호’였지 나처럼 ‘핫핫핫∼’ 하고 어금니의 충치가 보이도록 웃지 않았다.

얼떨결에 참석했던 나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다음 약속을 핑계대고 빠져나왔다. 그리고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을 통해 내 모습을 검토했다. 시장에서 산 니트스웨터와 백화점 마대에서 고른 바지, 플라스틱 귀걸이, 잡지에서 사은품으로 준 가방… 같은 중년여성인데 어쩜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사실 나 역시 중년의 나이엔 우아함과 중후함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나이에 맞게 고상한 취향을 갖도록 노력해야 하고 스스로를 업그레이드시켜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한동안은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말도 천천히 하고 실없이 웃는 일 없이 아주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닷새 정도는 코미디 프로그램도 꾹 참고 안 보고 실없는 농담도 하지 않았다. 음악도 클래식만 듣고 책도 참선이나 명상록만 읽었다. 플라스틱 귀걸이를 떼고 새빨간 립스틱도 지웠다.

곧 주변의 반응이 나타났다.
“니, 어디 아프나?” (남편)
“우리 엄마 맞아? 도무지 엄마 같지 않아요” (딸)
“뭐 속상한 일 생겼니? 남편이랑 또 싸웠어?” (친구)
“그냥 예전처럼 사시면 좋을 텐데…?!” (동료)

전에는 제발 나이값 좀 하라고, 푼수 떨지 말라고 그렇게 야단을 치고 충고를 하더니 이게 무슨 일인가. 나보다 남들이 변모한 내 모습에 더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결국 난 어울리지 않는 ‘우아’란 옷 대신 내 몸에 맞는 ‘유치’란 옷을 입고 편안히 살기로 했다.

‘유치하다’ ‘푼수다’ 등의 비난을 받긴 하지만, 솔직이 유치하다는 것을 자타가 공인하고 나면 일상이 참 즐거워진다. 고상하고 우아한 품격을 유지하려면 경제적 부담도 상당히 크지만 유치한 취향엔 돈이 별로 안 든다.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파는 1천원짜리 액세서리 핀 하나로도 1주일은 기분좋을 수 있다. 신문 한장으로도 하루종일 즐겁게 지낼 수 있다. 신문에 실린 사설이나 칼럼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의 운세’ ‘깔깔방’ ‘구인광고’ 등을 유심히 보면 의외로 웃기는 단어들이 가득해 그 어느 유머보다 재미있다.

나이값을 못하는 덕분에 각계각층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초등학생인 딸아이와는 만화나 가수 얘기를 하고, 중고생, 대학생들과는 요즘 유행하는 것들에 대해 주절주절 수다를 떨 수 있다. ‘점잖으신 분’이란 대접은 못 받지만 ‘깝깝한 아줌마’라고 왕따를 당하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또 울고 싶을 때 울고, 웃고 싶을 때 맘껏 웃으니까 우울증에 시달리지도 않는다. 사회학자들과 의학자 등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여성이 남성에 비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서도 훨씬 더 오래 사는 것은 눈물과 웃음을 억지로 참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난 일단 장수할 조건은 갖춘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사람들은 유치한 인간에게 비웃음을 보내긴 해도 비수를 던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덕분에 평화롭게 보낼 수 있으니, 난 죽을 때까지 유치하게, 그것도 아주 유치찬란하게 살 거다.

출처 : 碧 空 無 限
글쓴이 : 언덕에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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