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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자녀

유앤미나 2011. 4. 22. 02:09




행복한 자녀


전교 수석 실력 정도 학생만이
들어간다는 KAIST는
최근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해
성적 저조 학생들에게
징벌(懲罰)적 수업료 부과를 시행해 왔었다.

수업료 내는 일이야
일반 학교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평소 최고 엘리트라고 자부했던
KAIST학생들에겐
최대의 굴욕이라 여겨
벌써 올 들어 네 명이나 자살하면서
우리나라 교육은 다시
한 번 도마 위에 올라가 있는 상황이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총장님 살려 주세요'
등등 하소연 하는 글에서
우리는 다만 그들의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가늠해 볼 뿐이다.

이젠 한술 더 떠서
교수까지 자살하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KAIST는 졸지에 다시 겨울로
돌아가는 듯 하다.





사람들은 오늘도
행운(幸運)의 네잎 클로버를 찾는다.

나폴레옹이 전투 중 평소 찾기 힘든
네잎 클로버를 발견하고
그 잎을 주우러 허리를 숙일 때 총알이 빗나가
살아난 일이 있은 후 네잎 클로버는
행운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네잎 클로버보다
더 좋은 것은 행복(幸福)의 꽃말이 있는
세 잎 클로버다.

우리가 90년 산다고 가정하고
1년 365일을 대충 계산해도 30만 번이나
넘는 일상의 행복은 외면한 채,

평생 어쩌다 한 번 만나는 행운을 위해
언제나 전투적 삶을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이번 KAIST 일은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그들이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고
하소연한 것처럼
현대인들은 성공과 행운을 위해 목숨 걸지만,
설령 그 모든 것을 성취했다 해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늘 남과 비교하느라
나에게 주신 것에 감사치 못하고,
없는 것만 생각하고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면서
마음 속의 파랑새를 그리며 행운을
기대하고 있다.


과연 나는 내 자녀가
성공한 자녀가 되길 원하는가.
아니면 행복한 자녀가 되길 원하는가.

우리는 이번 일을 통해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인생(人生)을 행복하게 하는지
생각해 봐야할 것이다.





행복한 자녀는 자아상 확립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성공한 사람들과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분명한 자아상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자아상이란 자신에 대한 자기인식이다.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왜 중요한가.
인생은 자기 생각대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바르게
아는 것처럼 중요한 일도 없다.
흔히 주제 파악한다는 것이 쉽지 않듯이
자신을 바르게 아는 사람이 드물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이후에도 지금도 두 개의
거짓된 사상을 통해 왜곡된 자아상을 갖게 한다.

유리같이 연약한 인간은
한 평생 자신은
쓸모없다는 자기비하적 사상과
반대로 대단한 존재라는 초인적 사상,
둘 사이에서 갈등하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 상처보다 더 심각한 것은
자신에 대한 기준을
세상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 기준으로 본다면
소수 외에는
전부 다 하위등급에 속하기에 스스로
좌절할 수밖에 없다.





우리 자녀가 이 올무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선 축복의 언어를 통해
분명한 자아상을 갖게 하는 일이다.

인간의 말은 예언과도 같다.
자녀의 인생은 부모 말대로 되고 있다.

칭찬은 과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놀라운
힘이 있음을 여러 사례를 통해
잘 알고 있다.

심리학에서는 그것을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했다.
교육학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했다.

내 자녀들은
칭찬과 격려 그리고 신뢰를 통해
확신과 비전을 갖고 최선을 다할 때
행복한 자녀가 될 수 있다.


아울러 칭찬만큼 중요한 일은
상처가 되는 일이
없도록 부모는 신경 써야 한다.

더욱이 평소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평생가기 때문에
칭찬만큼 관심 갖고 지도해야할 부분이다.

부모가 가장 조심해야 할
<상처 7계명>을 정리해 보았다.

편애, 비교, 지나친 강요,
기를 꺽는 말, 과잉보호 그리고
일관성없는 태도와 듣지 않고 판단하는 모습들이다.

자녀는 내 소유물이 아닌
신이 맡겨준 기업이다.

율법을 몽학선생이라고 했듯이
부모는 바른 자아상을 심어줄 책임이 있다.

내 기준이 아니라
신의 기준에서 축복하고 칭찬하므로
바른 자아상을 갖도록 할 때
그들은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된다.





이렇게 분명한 자아상이 형성하게 되면
내일의 꿈과 비전을 갖게 된다.

어느 사형수의
마지막 소원은 어머니와 키스였다.
집행관은 소원을 허락하여
어머니를 만났는데 그는 키스대신
입술을 깨물어 버렸다.

갑작스런 상황에 모두가 놀라고 있을 때
사형수는 이렇게 울부짖었다.

“내가 사형수가
된 것은 다 어머니 책임이요,
어릴 때 이웃집 물건을 훔칠 때는
집에 도움이 되는지 아무 소리도 안하다가
작은 실수라도 하면 화를 내면서,
‘네 깐 놈이 별수 있겠어? 니 애비와 똑같아!!!’
이런 말을 어릴 적부터 들으며 나는
꿈도 없이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다 이렇게 사형수가 되었기 때문이요!!!”


사람에겐 자아상이 이렇게 중요한 일이다.
자아상은 자신을 아는 출발이라면
꿈과 비전은 자신에게
맞는 삶의 형태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욕구(慾求)가 채워질 때 만족감을 느낀다.
곧 꿈이 이루어지면 행복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꿈은 이렇게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갖게 되는 작은 욕구나
기대들이 모아져 만들어진 그림이다.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능동적인 삶 자체가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요즘 사람들은
꿈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

아마도 가장 큰 요인은
자신의 개성에 맞는 꿈을 성취하는 일이
행복이 아니라 이미 공식화된
성공적 일에 매진하기 때문에 꿈은
존재가치를 잃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축구선수 베컴은
나보다 연봉이 몇 백배 된다고
그가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니다.
만약 베컴이 행복하다면
자신의 꿈을 이루었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지
연봉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명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꿈 자체가 없거나 있다면 그 비전을
향해 올인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다른 요인들은
다 핑계일 뿐이다.


꿈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마치 여행하기 전
여행을 꿈꾸며 준비하는 과정이
더 행복하듯이 성취 자체가 아니라,

준비하는 과정이
인생을 더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꿈은 또 다른 꿈을 꾸게 하고
그것이 설레임을
가져다주며
삶을 여유롭게 만들어 준다.





이렇게 행복한 자녀는
바른 자아상을 갖고 비전을 통해 자신을 향한
사명(使命)을 알므로
의지를 갖고 그 일을 감당할 때
행복한 인생이 된다.

꿈과 비전은
웅대하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취할 수 있는
힘과 배짱이 있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요즘 학생들은
머리를 좋으나 의지와 절제력이 약해
작은 일에도 쉽게
포기하는 일이 가장 큰 문제다.


KAIST 학생이 올들어 네 번째 자살한
그 날 서울대 졸업생은 취업에
실패했다고 숙박업소에서 자살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문제의 근원은
경쟁 구도로 만든 총장에게 있다는 듯
마녀 사냥식으로 몰아가고 있다.

온갖 비난에 염증을 느낀 총장은
훌훌 떨고 떠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KAIST와
학생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겠는가.





오늘 어느 신문에는
‘KAIST 경쟁자는 지금도 뛰고 있다’는
제목으로 개교 150주년을 맞는
MIT에 가보니,
평소에도 학습량이 소방호수로
물 쏟아 붓듯 엄청난데,

중간고사엔 지옥주간이라고 말할 정도로
24시간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하며
이 모든 한계상황을 견디어 내고 있는데,
세계 24위인 KAIST는 이 일로
멈출 수 없다는 논조였다.

어느 교수는 <4월의 제문>을 통해
“죽을 각오로 공부하되
스스로 죽는 나약함은 이겨다오”라고 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좋은 환경 속에서
자라서 그런지 꿈을 키울
‘깡’이 부족하다는 것이 제일 큰 약점이다.

하버드나 카이스트는
다 불완전한 천국이지만 절제력과
의지력을 통해 천국같은
이상향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행복이란 단순한
정제된 지식도 필요하지만,

살아가면서
자신과 무관한 삶의 무게를
견디는 인격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는데 있다.

행복한 자녀는
바른 자아상을 통해
내일에 대한 비전을 갖고
온갖 풍파를 견디어내는 의지력에 있음을
KAIST 사태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주여,

당신은
이미 우리에게
행복(幸福)을 주셨건만 어리석은
저희는 행운만을 쫒아
갔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멍에를 덜어주면서
인생의 어깨에 힘을 실어주는
현답은 없음을
깨달으며,

오늘도
외롭더라도
괴롭더라도
진정 당신이 주신 비전이 있다면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위해 살아가게
하소서.

2011년 4월 19일 강릉에서 피러한(한억만)드립니다.


사진허락작가ꁾ이요셉님, 투가리님, 갈릴리마을(우기자님), 포남님
^경포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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