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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공천

유앤미나 2008. 4. 9. 17:21



인생 공천(公薦)


각 당마다 공천(公薦) 후유증이 생각보다 크다.
민주당은 지도부와 공심위가
정면대치하면서 공천심사를 중단했다.

박재승 공심위원장은 당 지도부와의
연락도 끊은 채,
파업 아닌 파업을 벌이고 있다.

한나라당도 공천 후폭풍으로
신음(呻吟)하고 있다.
현 의원 39%를 물갈이 했지만,
개혁 공천에 대한 칭찬은 찾아볼 수 없고,
보복 공천이라는 비판만 난무하다.


YS가 가장 먼저
공개적으로 비판(批判)했다.
이번 공천은 민심을 전혀 반영치 않음으로
서울에서 과반도 못 넘길 것이라고
악담까지 했다.

지난해 이대통령을 적극 지지해 왔던 그가
총선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공개적으로 한나라당을 공격하는 것은
이레적인 일이었다.

사람들은 아마도
그가 차남(次男) 현철씨와
대변인 격인 박종웅 전 의원이
당규에 막혀 신청조차 못한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공천에 탈락(脫落)한 의원들도
각기 살길을 찾고 있다.

일반적으론 당적을 변경하거나,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지만,
특이하여 남편 대신 부인이 대리전으로
뛰는 경우도 있고,
아예 친정을 복수하려고 상대 당을 돕겠다고
선언(宣言)하는 경우까지 있다.

또 한나라 낙천자들을 끌어 들인
이회창 선진당은
충청(忠淸)권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당을 옮기든 대리전으로 뛰든,
낙천자를 끌어들이든 이 정도
선에선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동정(同情)론을 내세워,
현 여당 지지층을 잠식하고 있는
‘친박연대’ 그룹은
너무 이질적(異質的)인 형태로
변형되어 가고 있기에 이해하기가 어렵다.

아니 자신(自信)이 공천 받았으면
옳은 것이고, 아니면
무조건 불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을 통해 한국정치의
한 단면도를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들은 승자독식(勝者獨食)이라는
공천결과를 빌미로 삼아,
특정인물 우산 속에 들어가 짝짓기 하는
모습들은 명분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살기위해서는 언제든지
대의(大義)를 저버릴 수 있다는 기회주의와
사술만이 난무하는 정치판을
또 한 번 확인시키는 것 같아 씁쓸할 뿐이다.





아무리 정치의 목적이
정권쟁취에 있다 해도 정치인은
분명한 대의명분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물론 개인적으로 볼 때 각 당에서
행하는 공천이 어찌 마음에 들 수 있겠는가.
하지만 당의 입장에서는 전략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사는 이곳에서도
여론(與論)과 공천은 판이하게 달랐다.
지난 주 어느 모임에서도 공천에
대해 성토를 하면서도
당의 전략은 이해한다는 분위기였다.


어찌하겠는가. 세상만사(世上萬事)
다 생각대로 되던가.

인생살이에서도 무슨 일이
생각과 다르게 진행(進行)될 때 당시에는
쓰리고 아프지만 후에는 그 일들이
더 큰 의미와 축복의 기회가
되었음을 수없이
우리는 이미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공천을 떠나서
시대의 섭리(攝理)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공천의 이러한 과정들을 보며
문득 내 자신이 정치판이 아닌
인생에서 신과 이웃들로부터
공천 받는다면 받을 수 있을까하고
생각해 보니, 고개가 갸우뚱
거리며 고민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정말로
신과 이웃이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평가(評價)할 때,
이의 없이 공천 받으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할까를 묵상해 보았다.





인생에서 공천 받으려면,
가장 먼저 참신(斬新)성이 요구될 것이다.

모든 당마다 새로운 인물(人物)을 찾다보니
젊은 사람이나 법조계에 있는
사람이 공천되는 경우가 많았다.

비례대표를 선정할 때도
사회적 약자 계층을 대변하는 인사를
1번으로 하고, 사회통합 차원에서
어두운 곳에서 봉사한 분들을 상위 순번에
올리다보니 여성이나 장애인 그리고
호남 출신 등을 배치(配置)했다고 한다.

이렇게 참신한 사람을 염두 해 두고
공천하다보니 그들은 한결같이
법조계나 상징성 있는 인물이 뽑혔는데,
과연 그들이 참신한 사람일까.


원래 참신(斬新)하다는 말은
‘새롭고 산뜻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금뿐만 아니라 언제나
사람들이 새롭고 산뜻한 ‘참신한 사람’을
찾는 것은 다람쥐처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살다보면
누구라도 매너리즘에 빠져,
독창성과 신선(新鮮)한 맛을 잃고
현상유지 수준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을 찾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모습은 그 모임의 이익을 위해서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것보다는
자기 자신도 처음 일을
시작할 때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고픈
본능(本能)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공천된 사람을 판단하듯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신선하게 볼까,
아니면 진부(陳腐)하게 느낄까.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땐
내 일터는 광야(廣野)와 다를 바가 없었기에,
나는 진실과 열정을 다해 일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폭풍들이 지나가고 또 일에
익숙해지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져 열정은
물론이고 진실(眞實)까지도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번 공천에서 퇴물 취급받는 그들도
한 때는 나라를 위해 혼(魂)을 다해 일을 했지만,
지금은 참신은커녕 왠지 새 시대로
나아가는 길목을 막는 짐짝처럼
느껴지는 것을 보며,

내 자신도 매순간 다가오는
매너리즘을 극복하지 못할 땐
그들과 하등(何等) 다를 바가 없음을 알기에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자리 보존이 아니라
아직도 이 자리는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지속적이고,
주도적인 자기계발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인생에서 공천 받으려면,
먼저 참신(斬新)성이 요구되고,
다음으론 다른 사람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참신한 사람은
소신이 분명하다는 장점이 때론
단점(短點)이 되어
타협을 모르는 고집불통이 되어
같이 일하는 사람을 힘들게 할 수가 있다.

세상 모든 일이
소신(所信)만 갖고 되는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여당이 야당과 같은 생각하고
야당이 여당과 같이 행동할 때 공동체에
유익을 줄 때가 많이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자기입장과 명분에 막혀서 상대의 생각이
더 옳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목소리만 목청 내세우고 있다.


칸트는 끊임없이 다음 네 가지를 물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나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위 세 가지를 통해,
그는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질문(質問)했다.

하지만 미완성적인 존재인 인간이
질문의 주체와 객체가 되기에 답(答)할 수 없고,
날마다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또 인간은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에
어떤 대안도 만족을 줄 수 없기에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에게
내 의견만 옳다고 주장(主張)할 때 도대체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체에 무슨
유익을 줄 수 있겠는가.

참신한 소재(素材)가 꼭
좋은 영화가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내 생각과 이상(理想)을 넘어서
타인의 생각들을 인정하고 수용함으로
새롭게 각색해 나갈 때,
생각지 않는
공동체 유익이 창조되는 것이다.

이처럼 나를 넘어서서
타인의 생각을 빨리 알고 있어야만
대화(對話)도 되고 같이 일할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생각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보통 다른 사람 마음을 읽는 것을
독심술(讀心術)이라고 하지만,
실제론 마음을 읽는 것이 아니라
다음 몇 가지 외적인 요소들을 통해
추측하여 알아내는 것뿐이다.

먼저 대화할 때 상대방의
무의식적(無意識的)인 행동이나 동작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그 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또 간접적인 방법으로 독서나 여행 등을
통해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도
본인 자신이 객관성(客觀性)을 유지해야만
상대방을 알고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 인생에서 공천 받으려면,
겸손(謙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나라당은 지금 실세라는
세 이(李)씨 때문에 곤욕을 치루고 있다.
잘잘못을 떠나서 당내뿐만 아니라,
여론조차 그들에 대해
싸늘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
끝까지 강행하겠다는 모 의원의 거만한 자태를
어찌 곱게 바라 볼 수 있단 말인가.

한나라당은 이제 국정을
책임진 여당(與黨)이 되었으므로 모든 일은
전략적인 소신도 중요하지만,
국민이 무얼 원하는지를 아는 것이 우선이다.

아직까지도 권력창출이 마치 몇몇
가신(家臣)들이 이루어낸 것처럼,
오만 방자하게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면
용서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이 나라
국민들을 모독하는 행위밖에 안 될 것이다.


신(神)이 가장
사랑하는 자는 겸손한 사람이지만,
가장 미워하는 자는 교만(驕慢)한 사람이다.

교만은 암(癌)처럼 일방통행 하므로
자신과 함께 모두를 파멸로 이끌지만,
겸손은 피(血)처럼 팔방으로 통하여
모두를 살리고 건강한 삶을 살게 한다.

세상천지에
누가 교만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겠는가.
하지만 누구라도 자신과 이웃의
소리를 무시할 때,
순식간에 모든 것이 막혀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신뿐만 아니라 사람도
겸손(謙遜)한 사람을 좋아한다.
누군가를 만날 때,
한 없이 마음 편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무리 만나도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그는 아마 분명 교만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기에 ‘겸손’이란 말처럼
한사람의 인격(人格)을
대변할 수 있는 말도 드물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공천 받으려면
반드시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니 사람은 교만한 사람을 모른다 해도
신은 정확하게 아시기에,

겸손하지 않고는
공천은커녕 그 분 앞에 설 수도 없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한계(限界)를 알고 있다.
개구리가 되어서도 올챙이 적 시절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

겸손한 사람은 늘 열려 있다.
교만한 자의 소리일지라도 귀를 열어주고
가장 낮은 자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안다.

겸손한 사람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
자신을 알고
이웃의 소리를 들을 줄 알고,
하늘과도 소통하기에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언제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다.

바로 이런 사람은 신(神)을 두려워하고,
이웃을 두려워 할 줄 알기에
사람들이 좋아한다.





주여,

다른 어떤 소리보다도
겸손하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겸손한 자는
마음이 가난한 자요,
온유(溫柔)하여
평화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이웃과 당신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

당신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사람입니다.

종에게
그런 은혜를 주옵소서.

2008년 3월 23일 부활주일에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


사진작가ꁾ 해와달(판다님) 투가리님 lovenphoto님 정기로의동행님 포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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