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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불행

유앤미나 2008. 4. 9. 16:52



이 시대의 불행(不幸)


전직(前職) 야구선수였던 이씨는
3월 10일 한강에서 익사한 사체로 발견됐고,
김씨 모녀는 같은 날 밤 화순에서
매장된 채 발견되었다.

부검해보니 김씨 모녀는 목이 졸리고
머리를 둔기에 맞아 죽은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많은 빚을 안고 있었던
이씨가 김여인의 전세자금 1억 7천만 원을 노려
모녀를 살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씨는 김씨 가족을 살해한 후
장기도피생활을 계획했었지만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태도를 바꾸면서 형에게 전해달라며
편지(便紙)를 주었는데,
‘내 아들을 잘 챙겨 달라’는 내용이
공개되면서 사람들을 더욱 분노케 하고 있다.

남의 딸 세 명은 잔인하게 죽여 놓고
정작 자기 아들을 걱정하다니,
인간의 이성(理性)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

세상이 이리도 황폐하고
인간의 심성이 아무리 모질다 해도,
어찌 이런 일을 져지를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곧 결혼(結婚)할 아저씨라고 믿고
친 아버지처럼 따랐던 김씨와
두 아이를 차 안에서 잔인하게 죽인 후,

밖에 나가있었던 큰 딸까지 찾아내어
밤늦은 시간에 불러내어
머리가 함몰(陷沒)될 정도로 망치를
휘둘렀다고 한다.

큰 딸은 그러한 변을 당하기 전에
친구들을 만나 자기는
곧 새 아빠와 가족(家族)여행을
떠난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고 한다.


백과사전까지 기재되었던
유영철 연쇄(連鎖)살인사건은 당시 가장
큰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그는 1년 동안 노인과 여성만을 골라
잔혹하게 21명을 죽였기에
잔인(殘忍)한 사람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악질(惡質)이었던 그보다
이씨를 더 악하게 보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유영철은 그래도
부유층에 대한 불만과 이혼한 뒤에
여성에 대한 혐오증이라는 주관적이지만
그럴듯한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이씨는 오직 돈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고,

다음에 유영철은 시차를 두고 불특정다수를
향해 분노를 터뜨렸지만,
이씨는 서로 잘 알고 정(情)도 많이 든
사람들을 몇 분 만에 동요 없이
계획대로 죽였다는 점이다.





아무리 정이 메마른 세상이라 해도
그렇지 어찌 인간의 도리와
이웃에 대한 정을 무시(無視)하고,
마음속에 키웠던 야수를 이런 식으로
뛰쳐나오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로 생각 만해도 진저리가 쳐지고,
세상이 싫어지고 사람이
미워지는 올 들어 최악(最惡)의 뉴스다.

하지만 더불어 나는 이 사건을 통해
이씨처럼 실제로 그런 일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해도 마음속으론
그 이상의 분노와 원망(怨望)을
품고 사는 이 세대를 향해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첫째로 인간성(人間性)을 향한 경고다.

오늘 나는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었던
세 사건이 아침부터 암울하게 만들었다.

먼저 김씨 모녀 살인범
이씨 내연녀인 차씨와의 인터뷰 내용과
지난해 12월 안양에서 실종되었던
이혜진양이 토막 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뉴스와

그리고 19살 베트남 신부(新婦)를 살해한
모질고 한 없이 못난 어느 40대
사내에 관한 기사였다.

돈 때문에 가족(家族)을 떠나
남편만 믿고 이억만리 타국으로 시집왔건만,
말이 안 통한다고 어린 신부를
날마다 폭행하다가 결국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판사도 그녀가 얼마나 딱했던지 판결문에서
이 나라를 대신하여 경제대국이라는
허울 속의 야만성(野蠻性)이
부끄럽다면서,
고인에게 참회성 글을 올렸다.


40여년 전 이 땅의 수많은 누님들도
독일(獨逸)에 간호사로 나가,
대다수 그곳에서 현지인을 배우자로 맞아
뿌리내리고 살아가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곳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탄압받고 멸시받는다는 뉴스는 들어보질 못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얼마나 잘 살고 있다고,
외국인(外國人)들에 대해 이렇게
모질게 대한단 말인가.

아니 이것이 진정
한국인의 심성이란 말인가.
우리 조상들이 물려주었던 훈훈한 인심은
다 어디에 팔아먹고 이토록
잔인(殘忍)한 민족이 되었단 말인가.





한국인들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이러한 괴물(怪物)들은
도대체 왜 생겨나고 있단 말인가.

최근 한국인의 사고방식(思考方式)과
가치관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이란 책이 출판되면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지금 한국인들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12가지
삶의 규칙(規則)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게 밥 먹여 주냐'로
대변할 수 있는 현세적 물질주의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권위(權威)주의가
한국인을 움직이고 있고
그것이 또한 우리의 인간성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서운 시신은 처음 봤다.’
이씨의 시신을 병원으로 이송했던
응급환자이송단 한 요원(要員)의 말이다.

그 얼굴이 바로 내 모습이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남보다 앞서기만 한다면 되고,
사기를 쳐서라도
남보다 많이 갖고 있으면 된다는
강도(强盜) 같은 심보가 그런 흉측한 모습을
갖게 했던 것이 아닌가.

안 된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살아선 안 된다.

우리 자신들 모르게 깊이 감춰져 있었던
잔인한 인간성을 극복하기 위해선
인성(人性)을 회복해야 한다.

인성이란 먼저 자신을 바로 알게 하고,
내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케 한다.

인성이란 이렇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모습이요,
더불어 살아가므로 진정한 행복(幸福)을
경험케 하는 최소한의 원리다.





둘째는 물질(物質)만능에 대한 경고다.

이씨의 살인동기가 부채가 아니라,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내연녀 차씨의 증언(證言)이 있은 후
사람들은 지금
더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하지만 설령 다른 의혹(疑惑)이 있다
하더라도 이씨의 많은 부채로
인해 생긴 일이기에,

근본적(根本的)으론 돈이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산업 사회는 사람들에게
안락(安樂)함과 풍요를 안겨주었지만,

풍부한 물질은 사람들에게
낙관적이고 진화론적 사고를 갖게 하여,
급기야 공산주의와 세계대전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불행(不幸)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세상은 물질문명에 빠지면서
참된 인성(人性)을 잃고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어 과학과 물질을
앞세워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을
경시하게 되면서
인간소외(人間疎外)의 사회가 된 것이다.


어느 철학자는 인류 최대의 적(適)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실용주의(實用主義)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실용이란
근본 이념이나 철학도 무시한 채,
오직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사고만을 내세워 단기적인 목표만을
이루려는 공리적(公利的) 사고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에겐 물질도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신이나 진리(眞理)보다도
합리적인 유익만을 앞세우다보면,

유물론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자처럼
사람조차도 한낱 사물(事物)에
지나지 않게 여기므로,
이씨같은 그런 엽기적인 행동이
가능했으리라 추측해 본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런
유사한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겠는가.
이 나라 앞날이 우려(憂慮)되지
않을 수가 없다.

주님도 광야에서 금식하실 때,
사탄이 찾아와 가장 먼저 돌을 떡이 되게
하라는 물질(物質)에 관한 시험을 던져주었다.

이제는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는
해결이 되었건만,
여전히 인간은 물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오늘도 그 물질로 인해 모든 문제들이
파생(派生)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문제의 해결(解決)방법으로
삶의 우선순위를 제시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 것이라‘

그가 떡이란 물질을 무시(無視)한 것이 아니라,
떡만큼이나마 진리나 근본철학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적(逆說的)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그것은 떡을 먼저 잡으면
말씀이라는 인생의 근본이나 철학은
결코 따라오지 않지만,

원칙이라는 진리를 먼저 잡으면
떡과 같은 물질(物質)은 얼마든지 올 수 있다는
진리를 삶 속에서 스스로 경험해보길
원하셨다.





셋째는 신뢰(信賴)에 대한 경고다.

사람들은 이씨의 유언성 편지를 보면서
분노(憤怒)했던 것은 어떻게 남의 자식은
셋이나 죽이면서 자기 자식은
잘 길러 달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유아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 범죄자(犯罪者)들을
조사해보면 거의 대부분 가해자들은
이웃에 잘 아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처럼
이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世上)이 되었다.


사람은 부족한 부분이 많기에
누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이웃이라는
정(情)을 갖고도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평소 서로 잘 알고 있다는
그 정(情)을 빙자한 배신은
용서하기가 어렵다.

믿음과 신뢰는 인간관계(人間關係)의
마지막 보루인데 그 신뢰를
기초로 한 범죄란
인간이길 포기한 악질적인 죄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공자(孔子)의 제자가
스승에게 나라가 바로 서려면 무엇이
필요하냐고 질문하자,

식량이 넉넉하고 군비가 충실하고
그리고 신의(信義)가 있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만약 부득이하게 이 셋 중
하나만 선택(選擇)해야 할 순간이 온다면,
어떤 것을 택해야 하느냐고 제자는
다시 되묻자 스승은 ‘신의’라고 답했다.

아마도 그것은
모든 인간은 한 번은 죽지만
그 순간까지 신의가 없다면 삶이란
죽음보다 더 무서운 지옥(地獄)이
되기 때문이다.

공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 원리는 모든 공동체에서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이 시대의 불행(不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신뢰의 바탕으로 관계를 맺었다는
부부간에도 사제 간에도,
심지어 종교지도자와 성도들 간에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종말이 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TRUST’(신뢰)라는 책에서는
어떤 나라의 복지정책과 국가경쟁력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신뢰지수라는
신뢰(信賴)의 수준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했다.

지금 내 말을 가족은 얼마나 믿어줄까.
내가 하는 말을 가까운 내 이웃은
얼마나 믿어줄까.

그것이 개인이나 가정의 행복지수요,
한 국가의 복지주소요,
경쟁력 자체가 된다는 것이다.





흔히들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고,
친구를 잃으면 많이 잃은 것이고,
건강(健康)을 잃으면
모두 것을 잃은 것이라고 말들을 한다.

하지만 거기에 하나 수정해야 할 내용이 있다.
‘...건강을 잃으면 많은 것을 잃은 것이요,
신의(信義)를 잃게 되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요’

내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은 이웃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어떤 능력이든 권력이든 형성되기 때문이다.





주여,

이 시대의 불행은
경제(經濟)적인 문제가 아니라,

물질만 쫓아가느라
인성(人性)은 바닥이 나있고,
서로 불신(不信)하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짐승들도 주인을
배반(背反)하는 일은 없는데,

인간은 유익을 위해선
신의라도 아무 거리낌 없이
버리는 현상 앞에서,

마지막
그 날에 믿음을 보겠노라
하셨던 당신의 말씀이
새삼 두렵게만 느껴집니다.

더 이상 당신의
인내(忍耐)를 시험치 말고,

당신과 이웃으로부터
신뢰받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2008년 3월 16일 고난주간에 피러한, 강릉에서 드립니다.


사진작가ꁾ 투가리님 lovenphoto님 햇볕같은이야기(최용우님) 포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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