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로 가리라
우리 몸 대부분이
물로 되어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은
호수나 바다를 보면 편안함을 느끼지만,
내가 갈릴리호수에서 느꼈던 평안(平安)함은
형용할 수 없는 신비스러움 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갈릴리만큼
아름다운 호수가 없다면서 극찬하며
수많은 예술작품들을 남겼다.
신약시대에 그곳 연안은
교통의 중심지이면서 옥토가 기름져
농산물(農産物)이 풍부해 인구가
매우 많았던 부요한 도시였다.
더욱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음료는 물론 농업용수와 공업용수까지
공급해 주는 생명의 젖줄이었다.
적어도 그들에게 갈릴리란,
온 몸에 피를 뿜어주는 심장(心臟)과 같이
식량과 식수 그리고 맑은 공기까지
제공하는 영원한 고향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
그 곳에 묻히길 소원했던 것이다.
갈릴리 호수는 이렇게 환경적으로
여러 면에서 유용했지만,
역사적(歷史的)인 의미는 그러한
가치들과는 비할 수 없는 큰 의미를 갖고 있다.
그 호수 언덕과 골짜기에서
예수는 군중들과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연약한 자에게 수많은 기적(奇蹟)을 베푸시고,
부활 후에는 또 가장 먼저 찾아가
낙심한 제자들을 다시 세웠던 곳이 갈릴리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그 때를 생각하며 조깅하고 있을 때 문득
그의 체취가 느껴져 천국의 동산을
그와 함께 거니는 듯,
감미로움과 황홀함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당시 예수를 ‘갈릴리 사람’이라고
불렀던 것은 그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 다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 곳에서 행하셨던 흔적(痕迹)들은
이스라엘과 그의 제자들뿐 아니라
모든 인생들에게도,
동일하게 겪어야 할 과정들이요,
또한 존재 목적이 되어야만
실패(失敗)하지 않는
성공적인 인생이 될 수 있음은,
그들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내가 어디에 있든 상관치 않고
지금 처한 곳이 갈릴리가 되어야 하고,
또 그러한 갈릴리 정신이 생의 중심(中心)이
될 때 우리 인생은 생각 이상으로
생의 목적을 분명하게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로 갈릴리호수는
제자(弟子)들을 부르듯 나를 부른 곳이다.
당시 갈릴리는 다른 광야에 비해
풍요(豊饒)로운 곳이었지만,
늘 착취당하므로 가난한 동네였다.
그런데 이방 족들에게 정복당한 이후에는
이스라엘 변방(邊方)이 되면서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며 꺼린 지역이 되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지만,
헐벗고 굶주리며 많은 설움을 당했기에
신은 예수를 갈릴리로 보내셔서
그들과 함께 살며 삶을 나누셨던 것이다.
그의 제자 중 여섯 명이 갈릴리 출신이고,
다른 다섯 명도 갈릴리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버린 그 땅에서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택하여
구약을 신약(新約)으로 바꾼 것이었다.
자칭 의인(義人)이라 여겼던 바리새인들은
그가 당시 죄인으로 여겼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보고 비난할 때,
의사(醫師)는 건강한 사람보다는
병든 사람에게 더 필요하듯이,
자신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다.
우리나라 초대 이승만 정권 때 각료 중
여러 사람은 이전에 천민(賤民)급에
속했던 버림받은 사람이었다.
양반들은 언문(諺文)으로 기록된 바이블을
천대 시 했지만, 아무 소망도 없던
그들은 그 책을 보면서 꿈을 갖게 되었고,
급기야 선교사를 통해 미국에 건너 가
공부하여 후에 초대정권의 각료가
되어 자신들을 내쳤던 이 땅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일꾼이 되었던 것이다.
오늘도 세상은 똑똑한 사람을
뽑아서 일을 시키지만,
갈릴리의 기준(基準)은 사뭇 다르다.
그는 가장 어리석은 자를 불러
지혜 있다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약한 자를 택하여 강한 사람을,
천한 사람과 멸시 받는 사람 그리고
없는 사람들을 불러서 스스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폐하신다고 했다.
짧은 인생이지만 매순간
자신의 어리석음과 한계(限界)를 알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낮게 여기는 자세(姿勢)가
얼마나 큰 지혜이며 능력인지 적어도
갈릴리 사람들은 그 비밀을 알기에,
늦은 시간에 부름 받은 일꾼처럼
주인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이웃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자신에게는 부름의
감격 속에서 일하게 된다.
두 번째 갈릴리 호수는
평온과 두려움이 공존(共存)하는 곳이다.
‘갈릴리’는 지역적인 특성을 살리어
‘변방’이라는 의미와 함께,
독특하게 '물결'이란 뜻이 있다.
그곳은 골짜기와 산지가 물결치는
구릉 지대로 이루어 갈릴리라 부르는데,
보통 평상시에는 잔잔한 호수지만
기후와 기압골에 따라 순식간에
파도와 폭풍이 일기도 한다.
우리 인생도 평소에는 잔잔하나
어느 순간(瞬間) 생각지 않는
크고 작은 파도로 인해 가슴조이며
살아가는 것이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신 후,
주님은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보냈는데
갑자기 돌풍(突風)이 불자 제자들이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주님이 물 위로 걸어오시자
베드로도 물 위로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자 겁이 나 물속에 빠지게 된다.
그 베드로처럼 나름대로
자신도 결단하며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인생의 바다를 건너가다 보면
예측할 수 없는 풍랑이 얼마나 많던가.
질병(疾病)으로 쓰러지고,
생명 같은 직장에 위기가 오고,
마지막 보루인 가정이 깨어질 위기가 오고,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岐路)에 설 때에
평온은 사라지고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삶 속에 풍랑(風浪)이 일 때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대부분 ‘죽음’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면서 더 쉽게 좌절한다.
공부를 왜 하는가.
안 하면 모든 것이 불리하여
그 만큼 죽음의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
직장생활이나 결혼생활, 노후보장도
따지고 보면 전부 안 죽으려고
하는 일밖에 안 된다.
해리포터 영화에서는 두려움이 올 때,
마음속에 가장 즐거웠던 장면을
생각해내면 공포(恐怖)가 사라진다고 했다.
그렇다면 ‘죽음’을 오히려 ‘좋은 일’로
바꿀 수 있다면 인생의 어떤
풍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될 것이다.
죽음의 근사(近似)체험 학계에 따르면,
대부분 사람이 죽으면 먼저
영혼이 육체로부터 이탈되면서 깜깜한 터널을
통과(通過)한 후 빛과의 만남을 통해
지나온 생을 반성한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과정들을 종교적으론
얼마든지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기에
보편적으로 말한다면 웰빙(Well-Being)은
웰다잉(Well-Dying)이라는 것이다.
삶이 곧 죽음과 진배없음을 알고
어떤 풍랑(風浪) 속에서도
평안함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나름대로의 철학이나
신과의 만남이 필요(必要)하기에 오늘도
우리는 갈릴리에 있어야 한다.
세 번째 갈릴리는 회복(回復)의 장소다.
갈릴리는 그의 모든 열정을 다 바쳤던
곳이지만 온갖 설움을 다 당했기에
다시는 가보고 싶지 않을 텐데,
예수는 부활 후에도 가장 먼저 찾아가셨던
이유는 이제 모든 사역을 마무리하기 위함이었다.
철부지 같았던 그의 제자들은
스승이 십자가에서 죽자,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실의(失意)에 빠진 채 새벽녘에 빈 배로
돌아오고 있을 때 주님은 먼저
그들을 기다리고 계셨다.
그는 책망(責望)하지 않고 오히려
허기진 그들에게 숯불에 고기를 구워주면서
조용히 이렇게 질문하셨다.
‘베드로야, 네가 날 사랑하느냐’
‘...네 주님, 사랑합니다.’
‘그래? 그럼, 내 양(羊)을 먹이라’
너희는 내가 없더라도 계속
억눌리고 버림당한 갈릴리 사람들을
저 버리지 말고 그들과 함께 살며,
가르치고 섬기라는 부탁이었다.
부활(復活)이후 이러한 갈릴리 정신은
다시 회복된 제자들을 통해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하여 이천년이 지나
갈릴리 반대에 있는 한반도까지
전해 왔기에 오늘의 이런
안식(安息)과 평안이 있지 않는가.
사실 이 땅은 갈릴리보다
더 많은 한(恨)을 품고 있었지만,
갈릴리 사랑은 반만년의 어둠을 벗게 함으로
이제는 한국은 세계 속에서 빛으로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오직 그에게 회복되어짐으로
갈릴리 비전으로 살아가길 소원하는
갈릴리 맨 들을 통해,
갈릴리 사람을 섬기라고 명하신다.
갈릴리는 특정지역이 아니다.
모든 관념을 떠나서,
버림당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이다.
그래서
이라크에도 갔었다.
목숨 걸고 아프간에도 갔었다.
아니 단 한 번도 매스컴에 타지 않은 채
들어보지 못한 미 종족의 사람들을
밀알처럼 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통해 위로받고
새 삶의 가능성(可能性)을 통해서
인생의 부활이 일어나게 하는 동력이
바로 갈릴리가 아니었던가.
오늘 기도는
어떤 분의 시(詩)로 대신합니다.
...
사람들은 나를
칼날 같은 성격이라 하오나
주는 나를 온순하다 하시고,
사람들은 나를
죄인이라 조롱하오나
주는 나를 의롭다 하시나이다.
사람들은 나를
힘없고 나약한 자라 하오나
주는 나를 능력 있는 자라 하옵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달라고 하오나
주는 나에게 주시려고 만하시나이다.
사람들은 나를
주관이 뚜렷하다고 하오나
주님은 나에게 당신의 뜻대로만 하라 하시옵니다.
...
2007년 8월 5일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
사진허락작가ꁾ포남님 해와달(제임스박님) lovenphoto님 투가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