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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개의 풍선

유앤미나 2008. 4. 2. 14:35



33개의 풍선


미국 최악의 학교 총격사건 용의자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발표되면서
제 2의 국치일이라고 할 정도로
충격(衝擊)을 받으면서도
사건의 배경에 관심이 쏠려있다.

NBC에 보낸 우편물을 통해 전문가들은
어렴풋이 그가 고립된 자아 속에
잘못된 현대 문화가 그런 모방범죄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사건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누가 뭐래도 타락된 이 사회가 안고
있는 총체적 모순에서 기인되었음을
우리는 부인(否認)할 수 없다.

그럼에도 문제의 본질은
똑같이 모순된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왜 그는 좌절된 분노(憤怒)를
광란의 방아쇠로 표출했는가 하는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그 분노는
정체(整體)성 혼란에서 시작되었다.

그의 선언문을 보면 그는 왜
미국이라는 환경에서 적응하지 못했는가를
지극히 주관적인 메시지지만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을 알 수가 있다.

‘너는 내 마음을 파괴(破壞)했고,
나의 영혼을 강탈했고,
나의 양심에 불을 질렀다.
...’

누가 그의 영혼에 상처(傷處)를 주었단 말인가.
미국이란 현실은 항상 긴장과 좌절감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은 다민족과
다문화 속에서 살기에
수많은 계층 간의 차별(差別)들이
쉽게 좌절감과 분노를 낳게 할 수 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한인들은
어렵게 온 그 곳에 뿌리를 내리려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이번 사건을 통해 한인들이 공감하는 것은
누구라도 자기세대는 희생하더라도
자식들은 잘 되길 바라며 모든 것을 참고
일하는 부모들은 Mr.조 부모와 같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미국이라는 현실적이 상황들을
이기느라 심신이 병들어가고 있을 때,
자녀는 자녀대로 마음의 상처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민 왔지만
모든 것이 낯설기에 외톨이가 되기 쉽다.
무엇보다도 언어(言語)로 인한
정체성 문제는 두 분류로 구별하게 한다.

영어에 적응하지 못하여 학교에서
문제아로 찍히고 왕따 당하는 부류와,
이제 아예 영어가 모국어로 변하는 아이들은
언어가 진보할수록 부모와 한국인에 대한 정체성
때문에 혼란이 오는 또 다른 부류가 있다.

그러나 우리말과 영어도 잘하고
정체성에도 전혀 문제가 없는 아이들조차도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오면 숨 쉬기가 어렵듯이,
미국에서 생활하는 외로움이란 어찌 말로
다 표현(表現)할 수 있겠는가.


미스터 조도 어릴 때
미국에 갔기에 여타 가정처럼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대는 컸을 것이다.

출세해라! 성공해라!
내 인생 다 바쳐서 니들 키웠는데,
너는 겨우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 하니...

그는 이렇게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기대와 상처를
받으며 막연한 분노와 증오들이 쌓여갔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었다는 누나의 안타까움이
이 사건(事件)의 필연성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Mr.조를 지지할 수 없는 것은
사람은 똑 같은 환경 속에서도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이 있고,
타인의 아픔을 달래주는 사람과
연약함을 빙자하여 고통을 주는 사람도 있다.

아니 편집(偏執)증에 걸린 자처럼
평생 불신하고 보복하려는 사람도 있지만,
자기 속에 갇혀 있는 수많은 연약함에도
오히려 남을 돕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외적인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은 그 자체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엄연한 인생의 현실을 직시해야만 한다.

Mr.조는 선언문(宣言文)에서 어이없게도
현대사회의 물질만능과 탐욕, 쾌락주의에 대한
징벌(懲罰)을 범행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는 ‘너는 벤츠로도 부족했지.
속물 덩어리 너는 금목걸이로도 만족하지 못했어.
보드카, 코냑도 충분하지 않았고
그 모든 향락에도 너는 만족하지 않았어.
...’

한 마디로 그는 미국사회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만족하지
못했다고 항변했는데, 그것은 어쩜
자신의 스토리가 아니었던가.

미국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사는 어느 곳이든
다 마찬가지 문제가 아니겠는가.
솔로몬처럼 이 세상은
결코 만족(滿足)이란 있을 수 없다.





언제쯤 사랑을 다 알까요
언제쯤 세상을 다 알까요
얼마나 살아봐야 알 까요
정말 그런 날이 올 까요
...
이문세 씨의 ‘알 수 없는 인생’ 가사는
죽음은 확실(確實)하고 인생은 불확실하다는
대사처럼 인생이란 내일을 알 수 없기에
지금 이 순간이 아름다운 것이다.

인생엔 정답(正答)이 있을 수가 없다.
고로 만족이라는 자신의 이상에
집착하여 만족을 찾아 헤매지 말고
항상 모든 일 속에서 만족을
발견하려는 마음자세가 더 중요하다.


빌게이츠는 인생이란
원래 공평(公平)하지 못하다고 했다.
그런 현실에 대해 불평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아무리 부자(富者)라도 가시와 슬픔을
안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삶이란 모름지기
그런 고통 속에 드문드문 기쁨을 음미하는
드라마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인생이라도 줄곧 어둠만 있고,
빛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는 빛을 기다리며 인내하고,
빛 속에서도 어둠의 아픔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이
신의 섭리요 삶의 질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빛만 있으면 인간은 너무 간사할 것이고,
어둠만 있으면 좌절하여 삶을 포기한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 속에서도
성공하는 인생이 아니라 만족(滿足)하는
인생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 말할 수 있다.





또 하나 조승희의 문제는 스스로
이스마엘로 여기는 피해(被害)망상증이다.

시체로 발견된 조의 왼팔에는
‘이스마일 도끼’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는데,
범행 동기를 해독하는 새 키워드로 떠 오른 것이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처 사라가 아이를
못 낳자 여종을 통해 낳은 아들인데,
훗날 사라가 아들이삭을 낳자
여종 하갈과 그녀 아들을 사막으로 쫓아낸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의 두 모자를
내버려 두시지 않음으로
오늘날 중동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아랍 민족의 선조(先祖)가 되게 하셨다.


Mr.조는 스스로 버림받았던 이스마엘을
언제나 외톨이였던 자신으로
여겼을 공산이 크다.

아니 Mr.조 뿐만 아니라 대부분
한인(韓人)들은 하갈과 이스마엘처럼
미국에서 이방인의 설움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두 모자(母子)를 버렸지만,
신은 은혜를 베풀어 샘물을 주시고
큰 민족까지 만들어 주시지 않았던가.

모든 인생은 어쩜 광야에
버림받은 생으로 그들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러기에 피해의식을 갖고 신세타령만 할 것이
아니라 그에게 구원의 도움을 청하고,
거친 광야를 꿋꿋하게 개척(開拓)해 나가야 한다.

진정한 이스마엘 후예들은 오히려
들 나귀처럼 한결 같이 독립정신이 강한
영혼(靈魂)의 소유자 들이었다.





자칭 이스마엘에게 총알이 박혔던 피해자
가레트는 Mr.조를 용서(容恕)한다고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오히려 그는,
‘이런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를 만났었더라면,
그래서 그에게 다가갈 기회가 있었더라면…’
이라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이렇듯 진정한 이스마엘의 후예는
피해의식이 아니라 용서하며
돕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넉넉한 삶의 자세가 거친 광야에서도
승리의 삶을 살게 하는
지혜가 아니겠는가.





주여,

처음에는 저도
조승희가 원망스러웠는데,

글을 정리하면서
그가 제 자신의 모습임을 알면서
오히려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당신은 양지를 통해
이웃과 함께하시길 원했고,
음지(陰地)를 통해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자신을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 어떤 것이라도
적응(適應)할 수 있도록
당신의 은혜를 갈망(渴望)합니다.

그리하여 외톨이로 지내는
또 다른 조(趙)에게
친구로 다가가게 하시고
용서하게 하소서!

2007년 4월 22일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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