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한 것을 좋아하는 시대
최근 우리나라 청소년 성(性)범죄는
미국의 2배가 넘을 정도로
매우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10대 성범죄가 처음에는
단순한 일탈행위로만 보았는데 점점 더
성인보다 더 폭력적인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일은 마치
도덕신경 세포가 마비되어 죄의식이
아예 없는 사람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집단(集團)적으로 범행을 일삼고 있다는 점이다.
도대체 왜 우리는 미국과 일본보다 더
10대 성범죄가 증가하고 있을까.
전문가들의 먼저 인터넷을 꼽고 있다.
누구라도 쉽게 성관련 프로그램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난잡한 성생활을 유발시켰다는 것이다.
둘째는 입시(入試)경쟁에 있다.
우리 청소년들은 공부에 대한 강박관념이
유난히도 강한데 해소할 곳이 없어서
찾아갔던 PC방이나 노래방이
문제아로 만든 것이었다.
또한 성 교육(敎育)의 실패가 원인이 되고 있다.
선진국의 체계적인 성교육에 비해
우리는 아직도 미봉책에 그치는 환경들이
성범죄를 양산시키는
조건(條件)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인터넷과 입시경쟁 그리고
잘못된 성교육이
직접적인 성범죄를 증가시켰지만,
이것들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야한 것을 좋아하는
문화적 트레드 때문이다.
북한 청소년축구팀이 한국에 와서
곳곳에 달려있는 십자가와
많은 학생들이 안경을 쓰고 있는 일
그리고 핸드폰을 가장 신기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들은 우리에 비해 삶의 질은 떨어질지 모르나,
안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의 시력은
눈과 순수한 마음까지 보호(保護)받고 있었음을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잘 사는 것도 어렵지만,
순수함을 지키는 일은 더욱 어렵다.
왜 사람들은 잘 살수록 순수함을 지키지 못하고
자극적이고 육감(肉感)적인 것을 좋아할까.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음식은 싱겁게 먹어야 하는데 오히려
미각을 잃고 얼큰하고 짠 것을 더 좋아하고,
또 죽음이 가까울수록 영혼이 아이같이
순진해야함에도 더 탐욕적으로
변해가고 있으니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므로 이 시대가 야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성적인 문제뿐 아니라,
이전과 비교(比較)해서
더 본능적이고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고 있는 시대적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첫째로
편(便)한 것을 좋아하는 생활의 변화다.
은행 창구 업무시간 1시간 단축 추진,
이혼율 50% 육박,
80대 노모(老母) 길에 방치한 남매...
이런 뉴스들은 우리의 삶이 무게를 잃고
점점 더 가벼워지고 천박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현대인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모든 것이 즉흥적이고 지극히
이기적(利己的)이다.
마치 실에 묶여 있는 않는 연(鳶)처럼,
누구에게도 구속받기 싫어하고
내가 편하면 상대가
어떠하든 상관(相關)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에 묶여있지 않는 연은
마음대로 다닐 수 있어서 좋을지는 몰라도
금방 땅에 추락할 수밖에 없듯이,
야한 것은 은밀하게 즐길 수 있어
당장은 생기를 주는 것 같지만
진정한 삶의 안식과 평안(平安)이 없다.
모름지기 연이란 실에 묶여 있어야
바람을 잘 조절하여 비행(飛行)할 수 있고
또 언제든 되돌아 올 수 있다.
무언가에 묶여 있는 것을 싫어하고
혼자 자유롭게 지내고 싶지만
사람은 누군가가 있어야
최소한의 규율의 줄을 갖게 되므로
편안(便安)함과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편한 것에 너무 익숙하다보면
날마다 기대치만 높아지면서 일상(日常)에 대한
소중함이나 감사도 모르고
도무지 내일에 대한 설렘이 있을 수가 없다.
CDP는 MP3에 비해 조금 불편한 점이 많다.
그러나 CD 한 장 마다 추억이 있고
새로 살 때마다 설렘이 있지만,
MP3에는 아무리 오래
사용해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애정이 안 생긴다.
이것이 조화(調和)의 법칙이 아니겠는가.
음(陰)이라는 불편과
양(陽)이라는 안락함이 조화를 이루어야
건강도 유지하고 삶의 리듬도
유지해 참된 평안함을 느낄 수가 있게 된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은 넉넉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더 공허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몸과 정신이 조화(調和)를 이루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쳐있기 때문이다.
이 균형이 깨질 때 육체적으로는 병이 찾아오고,
정신적으로는 삶의 의미(意味)를 잃으며,
색(色)을 더 밝히면서 자연 속의
평안을 얻지 못하며 의미 없이 살아가게 된다.
누구라도 야한 것을 원(願)한다면
분명 서두르며 그의 때를 놓치기가 쉬울 것이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일자(一字)로 된 도로에서 사고율이 더 높고,
구불구불한 길에서는 사고율이 낮은 것은
속도보다는 과정을 통해 인성과 자연,
아니 참된 그의 뜻을 헤아려
볼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색(色)이 생각날 때 오히려 더
천천히 돌아가야 한다.
자신의 때를 기다리며 위험한 감정을
다스려야만 한다.
둘째는 야한 것을 밝히는 것은
심성이 더 잔인(殘忍)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어느 때부터인가
영화나 소설에서 인기를 끌려면
야하거나 잔인한 장면이 많이 나와야만 했다.
오이디푸스 신화(神話)는 현대인의 그러한
심리를 잘 드러내주고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는 신탁에 의해 친부를 살해하고
친모와 결혼해서 살게 되지만 죄책감으로
자신의 두 눈을 찔러버린다.
왜 인간들은 이토록 잔인한 것을 좋아할까.
사실 인간은 원래부터 잔인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생리적으로 잔인해 질 수도 있고
평화를 선택할 수도 있는 두 마음을 품고 있었다.
문제는 상황에 따라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는데,
평화보다는 잔인함을 더 많이
선호하는데 있어서 조건은 간단하다.
나에게 편리(便利)한 것은 무엇인가?
나에게 유리(有利)한 것은 무엇인가?
편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어떤 명분도
포기할 수 있다는 세계관(世界觀)이
사람을 잔인하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이기적인 감성들은
오이디푸스신화에서 보듯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잠재되어진 감정들을
잔인함과 색(色)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세상은 생각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기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편리하고
유익된 점이 있으면
바로 바로 숨겨진 감정들이 표출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카다르시스를 절대
선(善)으로 여기고 있다.
아니 그렇게 잘 배설하는 사람이
스트레스도 안 받고 더 행복하다고 여긴다.
오죽하면 어떤 작가(作家)는,
‘자위와 자살 중 자위가 낫지 않은가!’
‘섹스와 전쟁 이 중에서 섹스가 낫지 않은가!’
라고 말을 했겠는가.
그러나 정말로 여러 방식을 통해
억압된 감정을 배설시키고 카타르시스가
과연 사람에게 평안함을 가져다주는가.
엘리엇은 ‘황무지’를 통해
봄은 잔인하고 오히려 겨울이 편안했다는
역(逆)발상의 시를 발표했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진리는
겨울에 죽은 듯 조용하지만 그 때 싹을 키웠고,
봄비를 통해 뿌리를 흔들었다는 것이다.
편리함과 잔인함을 통해서는
어떠한 열매도 결코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겨울은 편하게 잠 만자고
내재된 성적에너지를 은밀하고 잔인하게
사용하는 나락의 시간이 아니라,
지금 당장은 재미없고
자신에게 별 유익이 없을 것 같지만,
새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성실하게
한 걸음씩 그 날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다.
주여,
할 말 다하고 살수가 없기에,
하고 싶은 짓 다하고
살수가 없기에,
억압(抑壓)된 그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오늘도
야한 것을 찾게 하고
잔인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잠깐의 배설이 쾌락은 줄지 몰라도,
참된 평안을 줄 수 없음을
알기에
이 종은 당신께
나의 편리함과 유익을
내려놓고 오히려 이웃의
한(恨)을 푸는 자가
되게 하소서.
2007년 4월 15일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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