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에 소신(所信)까지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 후 3년 동안
여러 번 임기(任期)에 관한
발언을 했었다.
그는 왜 이렇게 자주 거의 상습적으로
다른 것도 아닌 민감한 문제를
자꾸만 언급하는 것일까.
언론에서나 정가에서는 그 원인을
대통령 특유의 ‘피해의식’과 ‘원리주의’가
결합된 결과로 분석(分析)하고 있다.
집권 초기부터 그는 응석부리는 아이처럼 자신은
대통령으로 제대로 대접(待接)받지 못한다는
피해(被害)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니 스스로 늘 자신을
‘소수(小數)파’라고 규정하고 실제로
그런 사람들의 요구는 빨리 들어 주기도 했다.
이러한 생각은 탄핵(彈劾)의 과정을 통해
더 구체화 되었는데 곧
모든 비판들을 음모로 생각했고,
그 때마다 임기(任期)를 언급했던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피해의식이나
열등감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들은 많이 있다.
‘너는 형편없는 사람이야!’,
‘너는 아무리 꾸며도 가짜야!’
내면의 이러한 소리로
언제나 갈등(葛藤)하며 급기야
스스로를 미워하며 자아(自我)와
전쟁하느라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
그들에겐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특징들이 있다.
지나치게 타인을 의식(意識)한다든지,
나서기를 좋아하거나
말이 많은 사람은 십중팔구
열등감이 강한 사람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또 아무리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내용일지라도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도 역기 이 병에
감염된 사람으로, 그래야 열등감을
숨기고 스스로의 만족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소극적인 사람은 열등감으로 인해
자기 안에 갇혀 우울증(憂鬱症)에
걸리는 일이 더 큰 문제가 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의식을 지도자가 가질 때
그 파장은 상상(想像)키가 어렵다.
도대체 이러한 열등감은 왜 생기는 것일까.
가장 큰 요인(要因)은 아무래도
성장(成長)과정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어릴 때의 가정 형편과 형제간의 애정은
한 평생 자존감과 열등감이라는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다음으로 개인적인 환경(環境)이다.
신체적인 핸디캡이나 타인에 대한 인정욕구가
강한 사람일수록 잘 빠질 수밖에 없다.
또한 개인적인 실패 등이 원인이 될 수 있다.
누구나 실패를 경험하면 열등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고 또 자신감을 잃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 요인들보다 더 큰 것은
현재 자신의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고,
현실을 무시한 채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여러 요인으로
그들은 오늘도 현실에서 더욱 둔감한 채,
존재하지도 않고 볼 수도 없는 적과 싸우느라
바보들의 행진같이 악전고투하고 있다.
그러므로 열등감에 대한 치유도
이러한 원인에서 역(逆)차별화 하면 된다.
첫째로 자신을 용납(容納)하자.
개인의 어떤 실패든, 신체적 핸디캡이든
먼저 자신을 용납해야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사람이 화를 낼 때 사실은 70%는
자신에게 화가 나서 학대하는 모습이라고 한다.
내가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데,
타인이 어찌 나를 용납할 수 있겠는가.
소심할지라도 어느 시인의 시구(詩句)처럼,
나의 가장 약한 부분까지도 사랑해야만
이 병에서 자유 할 수가 있다.
둘째는 현실에 감사(感謝)하자.
누구나 남과 비교해 보면 감사보다는
불평(不平)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나친 이상적인 욕심(慾心)을 갖고
비교하는 것이 가장 큰 요인임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내 자신을 용납했다면,
개인의 차이와 현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장점(長點)을 발견하고 감사하며
자신과 타인을 칭찬(稱讚)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는 존재목적을 기억(記憶)해야 한다.
짧은 인생을 살면서
성공(成功)이 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눈앞의 단기적(短期的)인 목적을
위해 살아가지만 진정한 성공이란,
강이 있어도 폭풍이 불어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앞으로 정진하므로,
곧 한 평생(平生)을 통해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웃을 도우며 살아갈 능력을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인생에서 열등감은 이렇듯
자신과 환경 그리고 이웃을 용납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자체가 치유(治癒)의 길이 된다.
그러나 열등감과 함께
우리는 원리(原理)주의자라는 인생의
또 다른 적과 싸워 이겨야만 한다.
노대통령하면 첫 번째 이미지가
‘코드인사’라고 말할 정도로 한 번 결정된 일은
절대로 바꾸지 않는 그를 두고 원리주의자
라고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원리주의의 또 다른 말은
일방통행, 흑백논리, 자가당착 등
외골수적인 자기중심(自己中心) 삶을 말한다.
종교적으로도 원리주의는
나름대로 원칙과 진리(眞理)를 담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그들의 정책들이
공존의 삶을 위협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원리주의란
이러한 맥락과는 차원이 또 다른 고통과
상처(傷處)를 이웃들에게 주고 있다.
곧 자신의 의견은 전부 다 옳고,
나와 다른 의견은 배타적으로 받아들여
무조건 반대(反對)하고 따지고
덤벼드는 본능적 의식이다.
이런 원리(原理)주의에 빠진 사람은
자신은 언제나 잘하는데 기대에 못 미치는
상대로 인해 닫힌 마음들을 갖고 있기에
기회만 되면 책망(責望)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주의적인 사고로는
변화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정말로 모르고 있단 말인가.
문제는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직위(職位)로는 몸을 움직이게 할 수 있지만,
인격(人格)은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는
말처럼 먼저 기대에 못 미친다 해도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메시지가
우선되지 않고는 동역(同役)은 불가능하다.
그런 후에 나와 다른 그 사람을 통해서
또 그와 같이 일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수정주의(修正主義)가 필요한 것이다.
어떤 역사학자는 우리는 문화 수용 면에서
원리(原理)주의자지만 일본은 수정주의라고 했다.
그들은 어떤 문화든 매우 유연하게 대처하여
자신들의 사고와 생활에 맞게 다시
변용(變容)하거나 필요한 부분만
수용함으로 일본식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원리적이고 수구적인
자세로만 살아오다가 수 없는
외침(外侵)을 당하며 살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공산권 나라들도 원리주의를
주장하다가 망한 후에는 전부
수정주의로 돌아섰듯이,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도 이러한 상대에 대한
수용적인 자세로 변신해야만 더불어 살 수 있고,
또 자기 자신도 새롭게 갱신할 수 있는
기회(機會)가 되기도 한다.
주여,
어리석게도
숨겨놓은 곶감 모양
순간순간
열등감을 찾아먹으면서도,
그것도 부족했던지
저는 종종
이런 착각(錯覺)을 합니다.
‘나는 순진한 사람이다.’
‘그래도 나는 정직한 편이다.’
...
이러한 망상이
남을 판단(判斷)하게 했으며,
원리주의에 집착하는 그들을
미워했던 것입니다.
이제라도
...
착각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저부터
열등감과 원리주의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2006년 12월 첫 주 3일에 강릉에서 피러한이 보냅니다.
사진허락작가ꁾ서락샘님 해와달사이트 lovenphoto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