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님 같은 꽃
교도소 직원들을 지도(指導)한다는 이유로
매년 이맘때가 되면 재소자들이 만든
국화작품전시회가 끝나면
그 중 몇 개를 내 사무실에 보내온다.
그 향기는 한 달 이상
사무실과 복도까지 가득 채우며,
오고 가는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든다.
나는 그 꽃을 바라보면서 아이 같은
여러 상상(想像)을 하곤 한다.
한편으론 꽃을 보고 아직도 이런 감상에
젖어드는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국화꽃이 피기까지 많은
인내가 요구되고 있듯이,
나는 그만큼이라도
견디고 있는지를 반성케 한다.
이번에 캄보디아에 같이 갔던 선생님이
서정주 씨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를
읊으며 국화(菊花)에 대한 애찬이
멈추지 않고 계속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국화 애찬론 병이
나에게 전염되었는지,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상하게도
내 입에서 그 시가 맴도는 것이 아닌가.
국화는 물론 오래 전부터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그 고고한
기품 때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아왔지만,
요즘 들어 새삼스럽게
내가 그 꽃에 탄복하는 것은,
바람 불고 서리까지 내려 모든 꽃들이
떨어지는 가을철에도 꿋꿋하게
홀로 서서 향기를 발한다는 점이다.
‘국화 옆에서’는 보잘 것 없는
한 송이 국화꽃이지만 그 꽃을 피우기
위한 과정(過程)의 아픔과 어려움을
노래하는 시(詩)다.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고,
한 여름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운 것도,
그리고 가을의 무서리의 내림과 또 잠들지
못하게 하는 그리움과 아쉬움을 포함하여
한 생명이 탄생하기까지의 고뇌와 시련은
피를 뱉듯이 각고의 노력의 대가로
그렇게 꽃을 피웠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국화꽃이 피는 과정들이
인생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감동에 빠져들었다.
하잘것없는 생명체 하나가 태어나기까지도
유기적인 자연의 하나 됨이 요구되었는데,
하물며 한 인생(人生)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과정들이 필요하겠는가.
흔히 이 시(詩)에서
봄이 20대라면 여름은 30대,
그리고 국화꽃이 피는 가을은
40대의 인생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이제 보니 그러한 과정들은 단순히
연대기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완전한 한 생명이 형성되기까지는
반드시 외형적인 여러 고통은 물론이고
심리적으로도 불안과 방황 그리고 설음과
비통이라는 온갖 내적시련을 극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過程)들을 통하여 국화는
마침내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피우게 된 것처럼,
인생도 수없는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한 후에,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省察)할 수 있는
온전한 인격자로서 완성되어
간다는 사실이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아...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굴욕(屈辱)과 모욕이 필요하던가.
아니 인생은 누구말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견디는 것이다.
때론 국화처럼 먹구름 속에서 천둥이 울고,
간밤에 무서리가 내릴 정도로 인생도
매 순간마다 도망가고 싶지만,
자식 때문에 아니면
수많은 그 무엇 때문에 묵묵히
과정들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허나 그 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된다.
다시는 돌아보기도 싫어했던 그 모든
고통과 절망들이 이제는 자신과
화해하며 사랑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그 때 흘렸던
눈물들이 어느 덧 꽃이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한 영혼(靈魂)에 대한
소중함을 온 몸으로 체득하면서,
세상의 만상(萬象)들 속에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자신만큼 사랑하고
있음을 안후에 그 분께 감사할 뿐이다.
이러한 눈물이 있었기에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는 시구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며
누님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갖게 한다.
‘...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
시인은 이러한 과정을 겪음으로 피어난
국화꽃을 애인이라 하지 않고
누님이라고 비유한 것은
그만큼 그 꽃에 대한 친근함과
애틋함을 절절하게 보여준 것이다.
그 누님은 모든 풍상과 방황을 겪은 후에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다정다감하고
가을 향기가 나는 여인이다.
분명 그녀는 그리움과 아쉬움만
안겨주는 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온갖 세상 풍파에 시달린 그 누구라도
안을 수 있는 가을의 여유가 있는 여인이다.
20대의 이성의 봄을 지나,
30대의 쾌락의 여름을 지나,
40대의 야심의 가을철로 접어들면서
은은함이 깃들이는 진정한 여인이 된 것이다.
이제 그녀는 사람 앞에 선 것이 아니라,
절대자 앞에서도 부끄러움 없이
설수 있는 가을 여자가 된 것이다.
윤동주 시인(詩人)은
내 인생의 가을이 오면 절대자
앞에서 스스로 자문(諮問)해 본다고 했다.
사랑했는가?
열심히 살았는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 준 일은 없는가?
어떤 열매를 맺으며 살았는가?
삶은 아름다웠는가?
내 인생의 겨울 앞에
나도 그가 이렇게 묻는다면
과연 나는 무어라 대답할 것인가.
이제는 그녀처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는가.
아니 적대자(敵對者)가 아니라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가.
내 인생도
격정의 여름을 지나
분명 열매를 거둘 가을철이 되었는데,
지금이라도 그 분 앞에서
그 누님처럼 여유를 갖고 설 수
있을지 두려울 따름이다.
주여,
국화가 아무리
고상해도,
세상에 그 꽃보다 못난
인생(人生)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송이 국화꽃과 비할 수 없는
인생은 도대체 얼마나
견디어야만 합니까.
새삼
당신의 은혜와
긍휼(矜恤)이 왜 필요한지
절로 고개가 끄덕이게 됩니다.
더 견디게 하소서.
더 기다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자신의 힘이 아니라,
당신의 자비로 누님 같은
꽃의 향기를 발하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
2006년 11월 19일 추수감사절에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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