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어려운 일
친한 지인과 함께 바닷가에 가서 차를 마셨다.
많은 추억을 머금고 이제는 추운 겨울을 준비하는
바다는 흰 포구가 한없이 줄을 잇고 있었다.
대화 중에 어느 모임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공동체는 지금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에는 나도 잘 아는
사람이 끼어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는군요.’
‘본인은 정말 그 사실을 모른단 말이에요?’
‘자신의 참 모습을 못 보나 봐요...’
어리석은 인간은
세상 모든 것을 쳐다보면서도
정작 자신은 바라보지 못하는 모양이다.
요즘은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지
실내에서도 천체 관측이 가능한 텐트가 있고,
채내 속에 마이크로 칩을 넣어
온 몸을 손 위에 놓고 보듯 다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보면서도 강아지가 자기
꼬리보는 것이 어렵듯이 자기 속을 보는
일은 어려운 모양이다.
바이블에서도 교만한 사람은
견책을 들어도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다고 했다.
죄(罪)란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의미가 있듯이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은 비켜 가고 있다.
남의 눈에 있는 티끌까지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
이렇듯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을 볼 줄 아는 일이다.
물론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보자면
실망이 앞서기에 보고 싶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바로 보아야 하는 것은 그래야만
이웃을 제대로 알고 또 그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기에 사람들은
생각 없이 지나치고 있음이 안타깝다.
첫째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보기 시작한다.
톨스토이의 ‘진실을 알고 있어도’에서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평생을 감옥에서
아내와 자식을 잃어야 하는 사람을 보면서 왜 신은
그의 진실을 빨리 밝혀 주시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우리가 살다 보면
무엇 때문에 사는지 허탈할 때가 많다.
그리도 믿었던 사람에게 버림 당하고
또한 가장 확신했던 일이 실패로 끝날 때나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한 경우 등이다.
인간사회란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가.
아벨 때부터 이 세상은 억울한 사람들의 원한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인류역사라고 할 정도다.
조선시대 때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 주겠다고
설치되었던 신문고는 중간에 소리 없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인간이기에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속 시원히 되 돌려줄 뚜렷한 방법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게도
그렇게 부당하고 억울한 일 때문에
철옹성 같았던 자신의 방어기제가 깨어지면서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조폭들의 의리보다
더 무서운 것이 환우들의 사랑이다.
그들은 자신이 먼저 아픔을 겪었기에 동일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환우에게 긍휼한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이블에서 요셉만큼 완전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에게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다고
형들에게 노예로 팔리게 하고
주인 아내의 유혹을 당하게 하고
또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했단 말인가.
성품이 워낙 성실하였기에
일찍부터 아버지께 인정을 받았지만,
그것이 다른 이에게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요셉은 부당한 과정들을 통해 그는 얼마나
가슴을 두드리며 혀를 찼을까.
평생 형들을 저주하고
또 그 모든 일을 연출한 신을
원망하며 허송세월 할 수 있었으나
이러한 고난의 피정을 통하여 그는 오히려
그 분의 뜻을 알고 묵묵히 때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낮은 곳을 볼 때 자신이 보인다.
병원24시나 인간극장 같은 TV프로를 보면서,
‘우리 OO는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불치병으로 고통 중에 있는 가족들은
자신보다 훨씬 어려운 사람들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상대적인 위로를
통해 천천히 자신을 채근하게 된다.
누구나 감내키 어려운 세월을
견디었다는 것은 이렇듯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돌아보고
더 나아가 그들을 돌아볼 때 얻게 된다.
유혹이 올 때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면
신비할 정도로 새 힘이 솟는 것을 느낀다.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은
한결같이 자녀의 장애(障碍)가 아니었다면
평생 위만 바라보고 살았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사람은 위를 바라보면 불행(不幸)을 느끼지만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바라보면
용기가 생기는 법이다.
이전에는 자신이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남에게 먼저 상처를 주곤 했었는데,
자신의 그러한 반사적인 보호본능들이
더 큰 상처로 되돌아옴을 경험한 이후부터는
오히려 자신의 아픔을 통해 상대를
이해하고 그들을 도우려는
의식을 갖게 한다.
자신을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섬기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을 본
사람의 모습일 것이다.
스스로 세상을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참 시인은 어려운 사람이라는 말처럼
고통을 통하여 참된 자아를 찾고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바뀐 것이다.
셋째는 기도를 통해 자신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습관적으로 TV를 켜고 있다.
그러나 밤새 기다리고 있었던 뉴스들은
남아있는 희망까지 사라지게 한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현실은
뉴스 내용들이 아니라 나를 돌아볼 시간이
쉽사리 허락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나 홀로 집’ 영화 가족처럼
일어나자마자 분주하게 살아가지만
자신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만들지 못하다가
큰 일 터진 후에야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기다릴 줄도 모르고
평생 가도 기도할 줄도 모르다가
죽음을 선고받거나 아니면 비슷한 종착역에 가서야
이게 아니구나 하고서 자신을 성찰(省察)하다면
그 인생은 이미 철저히 실패한 셈이다.
그 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을 돌아보고 자책할 수밖에 없다.
죽을 때라도 자신을 돌아본다는 그것 때문에
사람은 동물과 구별 되고 있는 것이다.
아침 차 한 잔이 인생을 바꾼다는 제목처럼
행복은 작정하여 만든 휴가가 아니라
차 한 잔과 같은 작은 여유가
인생을 바꾸어 놓게 한다.
지금 기도할 틈이 없다거나
명상(冥想)해야 할 이유를 아직도 모른다면
선로를 벗어난 기차처럼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다.
살아있을 때 나를 돌아보는 일 중에 가장
좋은 방법이 기도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은 홀로 길 위에 서 있을 때에만이
자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여,
우리는
뭔가 부족하거나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어머니를 부릅니다.
그녀는
언제나 따스한 미소로
감싸 안아주시며
우리에게 격려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있기에
오늘을 이겨 나갑니다.
당신은
나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바로
당신을 통해
제 자아를 찾게 하소서.
2005년 11월 13일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
캄보디아는 오늘 오후에 출발합니다.
친한 지인과 함께 바닷가에 가서 차를 마셨다.
많은 추억을 머금고 이제는 추운 겨울을 준비하는
바다는 흰 포구가 한없이 줄을 잇고 있었다.
대화 중에 어느 모임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공동체는 지금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에는 나도 잘 아는
사람이 끼어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가는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는군요.’
‘본인은 정말 그 사실을 모른단 말이에요?’
‘자신의 참 모습을 못 보나 봐요...’
어리석은 인간은
세상 모든 것을 쳐다보면서도
정작 자신은 바라보지 못하는 모양이다.
요즘은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지
실내에서도 천체 관측이 가능한 텐트가 있고,
채내 속에 마이크로 칩을 넣어
온 몸을 손 위에 놓고 보듯 다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보면서도 강아지가 자기
꼬리보는 것이 어렵듯이 자기 속을 보는
일은 어려운 모양이다.
바이블에서도 교만한 사람은
견책을 들어도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다고 했다.
죄(罪)란 ‘과녁을 빗나가다’라는 의미가 있듯이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은 비켜 가고 있다.
남의 눈에 있는 티끌까지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
이렇듯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을 볼 줄 아는 일이다.
물론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보자면
실망이 앞서기에 보고 싶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바로 보아야 하는 것은 그래야만
이웃을 제대로 알고 또 그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기에 사람들은
생각 없이 지나치고 있음이 안타깝다.
첫째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보기 시작한다.
톨스토이의 ‘진실을 알고 있어도’에서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평생을 감옥에서
아내와 자식을 잃어야 하는 사람을 보면서 왜 신은
그의 진실을 빨리 밝혀 주시지 않을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우리가 살다 보면
무엇 때문에 사는지 허탈할 때가 많다.
그리도 믿었던 사람에게 버림 당하고
또한 가장 확신했던 일이 실패로 끝날 때나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한 경우 등이다.
인간사회란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가.
아벨 때부터 이 세상은 억울한 사람들의 원한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인류역사라고 할 정도다.
조선시대 때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 주겠다고
설치되었던 신문고는 중간에 소리 없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은 인간이기에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속 시원히 되 돌려줄 뚜렷한 방법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게도
그렇게 부당하고 억울한 일 때문에
철옹성 같았던 자신의 방어기제가 깨어지면서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조폭들의 의리보다
더 무서운 것이 환우들의 사랑이다.
그들은 자신이 먼저 아픔을 겪었기에 동일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환우에게 긍휼한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이블에서 요셉만큼 완전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에게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다고
형들에게 노예로 팔리게 하고
주인 아내의 유혹을 당하게 하고
또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했단 말인가.
성품이 워낙 성실하였기에
일찍부터 아버지께 인정을 받았지만,
그것이 다른 이에게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요셉은 부당한 과정들을 통해 그는 얼마나
가슴을 두드리며 혀를 찼을까.
평생 형들을 저주하고
또 그 모든 일을 연출한 신을
원망하며 허송세월 할 수 있었으나
이러한 고난의 피정을 통하여 그는 오히려
그 분의 뜻을 알고 묵묵히 때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낮은 곳을 볼 때 자신이 보인다.
병원24시나 인간극장 같은 TV프로를 보면서,
‘우리 OO는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불치병으로 고통 중에 있는 가족들은
자신보다 훨씬 어려운 사람들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상대적인 위로를
통해 천천히 자신을 채근하게 된다.
누구나 감내키 어려운 세월을
견디었다는 것은 이렇듯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돌아보고
더 나아가 그들을 돌아볼 때 얻게 된다.
유혹이 올 때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면
신비할 정도로 새 힘이 솟는 것을 느낀다.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은
한결같이 자녀의 장애(障碍)가 아니었다면
평생 위만 바라보고 살았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사람은 위를 바라보면 불행(不幸)을 느끼지만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바라보면
용기가 생기는 법이다.
이전에는 자신이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남에게 먼저 상처를 주곤 했었는데,
자신의 그러한 반사적인 보호본능들이
더 큰 상처로 되돌아옴을 경험한 이후부터는
오히려 자신의 아픔을 통해 상대를
이해하고 그들을 도우려는
의식을 갖게 한다.
자신을 벗어나지 못했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위해
섬기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을 본
사람의 모습일 것이다.
스스로 세상을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참 시인은 어려운 사람이라는 말처럼
고통을 통하여 참된 자아를 찾고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바뀐 것이다.
셋째는 기도를 통해 자신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눈만 뜨면 습관적으로 TV를 켜고 있다.
그러나 밤새 기다리고 있었던 뉴스들은
남아있는 희망까지 사라지게 한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현실은
뉴스 내용들이 아니라 나를 돌아볼 시간이
쉽사리 허락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나 홀로 집’ 영화 가족처럼
일어나자마자 분주하게 살아가지만
자신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만들지 못하다가
큰 일 터진 후에야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기다릴 줄도 모르고
평생 가도 기도할 줄도 모르다가
죽음을 선고받거나 아니면 비슷한 종착역에 가서야
이게 아니구나 하고서 자신을 성찰(省察)하다면
그 인생은 이미 철저히 실패한 셈이다.
그 때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을 돌아보고 자책할 수밖에 없다.
죽을 때라도 자신을 돌아본다는 그것 때문에
사람은 동물과 구별 되고 있는 것이다.
아침 차 한 잔이 인생을 바꾼다는 제목처럼
행복은 작정하여 만든 휴가가 아니라
차 한 잔과 같은 작은 여유가
인생을 바꾸어 놓게 한다.
지금 기도할 틈이 없다거나
명상(冥想)해야 할 이유를 아직도 모른다면
선로를 벗어난 기차처럼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다.
살아있을 때 나를 돌아보는 일 중에 가장
좋은 방법이 기도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은 홀로 길 위에 서 있을 때에만이
자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여,
우리는
뭔가 부족하거나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어머니를 부릅니다.
그녀는
언제나 따스한 미소로
감싸 안아주시며
우리에게 격려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있기에
오늘을 이겨 나갑니다.
당신은
나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바로
당신을 통해
제 자아를 찾게 하소서.
2005년 11월 13일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
캄보디아는 오늘 오후에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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