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7년, 18세에 여왕이 된 영국의 빅토리아는 재위 64년 동안 많은 식민지를 개척했습니다.
1840년 아편전쟁으로 중국을 손에 넣었고, 1857년 인도의 대영 항쟁을 진압해 인도 황제를 겸했고,
1877년 수에즈 운하 건설을 빌미로 이집트와 아프리카를 손에 넣었습니다.
1901년 그녀가 죽었을 때 영국은 너무 영토가 넓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습니다.
그처럼 여왕은 영토는 넓혔지만 사랑의 폭은 넓히지 못했습니다.
여왕은 19세에 사촌인 독일의 앨버트 왕자와 근친결혼을 했습니다.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한다고 행한 당시 왕실의 빈번한 근친결혼은 면역력을 약화시켰고
잘못된 유전인자를 발현시켰습니다. 그 여파로 빅토리아 여왕도 혈우병 보인자(保因者)였습니다.
여왕은 5명의 딸과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막내아들 레오폴트 왕자가 혈우병 환자였고,
둘째 딸 앨리스 공주와 막내딸 베아트릭스 공주가 보인자였습니다.
둘째 딸인 앨리스에게는 6자녀가 있었는데, 그녀의 셋째 딸인 이레네도 혈우병 보인자였고,
둘째 아들인 프리드리히에게도 혈우병이 있었습니다.
결국 프리드리히는 3세 때 형과 침대에서 놀다가 열린 창문 넘어 아래로 떨어져 피가 멈추지 않아 죽었습니다.
앨리스 가정의 비극은 계속되었습니다.
1878년 디프테리아가 돌 때, 막내 딸 마리가 죽자 10살이 된 장남 루드비히가 충격을 받고
고열로 헛소리를 했습니다. “엄마! 동생이 생각나요. 제게 키스해주세요.” 전염병이 돌 때 키스는 금물이었지만
그녀는 키스했다가 결국 디프테리아와 과로로 죽게 되었습니다.
주치의가 “공주님! 왜 키스했어요?”라고 묻자 그녀가 말했습니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열 번이라도 할 거예요.”
다행히 아들은 살았지만 그녀는 35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앨리스의 자녀 6명은 대부분 불행했고, 자손도 거의 끊겼습니다.
근친결혼이라는 폐쇄적 사랑의 결말입니다. 백마 탄 왕자와 아름다운 공주의 동화 같은 결혼에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은 비극이 숨어있는 이유는 사랑의 폐쇄성 때문입니다.
폐쇄성을 극복하지 못하면 동화 속의 희극은 실화 속의 비극이 됩니다. 사랑의 폭은 넓어야 합니다.
나의 가장 큰 소원 중의 하나는 두 딸이 좋은 남편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딸이 속칭 날라리 같은 남자를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에는 억장이 무너질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낌새를 보아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것 같으면
딸의 안목과 선택을 존중해 그 결혼을 허락할 것입니다.
헛된 날개를 단 날라리에게도 진짜 좋은 날개가 생겨서 높은 하늘을 비상하게 될지 어떻게 압니까?
내 생각과 안목만 고집하면 나의 행복도 없고, 남의 행복도 막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문제는 ‘환경 문제’가 아니라 ‘자기 문제’입니다. 내가 보기에 좋은 길이 안 좋게 될 수도 있고,
내가 보기에 나쁜 길이 더 좋게 될 수도 있습니다.
폭넓은 사랑만 잃지 않으면 현재의 비극이 미래의 희극으로 변할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 이한규의 "사랑칼럼" 중에서 -출처 : 50-70대의사랑과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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