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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삶의 향기] 마지막 말씀

유앤미나 2012. 7. 26. 15:57

[삶의 향기] 마지막 말씀 [중앙일보]

살면서 어른들로부터 여러 말씀을 듣게 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나직한 목소리로 하는 이야기였기에 흘려듣기 쉬운 말씀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해 하루이틀 묵었다 떠나올 때도 어른들은 “그동안 여러 가지로 폐가 많았습니다”는 말씀을 꼭 건넸다. 늘 입던 옷을 다시 걸친 느낌 정도의 것이어서, 혹은 우리가 매일 호흡하는 공기와도 같이 편안한 것이어서 이 말씀에 대해 느끼는 각별함이 그동안은 크지 않았다. 말씀에 별다른 무늬가 없었다. 굳이 무늬가 있다면 삶 그대로의 무늬일 뿐이었다.

그런데 최근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이 말씀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마도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한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김 추기경께서 세상과 이별하면서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남기셨다는 것을 알게 된 그 무렵부터였다. 이 짧은 고별사를 접하고 나는 한동안 정신이 나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 가슴속으로 갑자기 큰 강물 같은 것이 출렁출렁하며 들어서는 것만 같았다. 화려함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는 이 수수한 차림의 문장. 그러나 매정한 사람에게도 저절로 정이 쏠리게 하는 문장.

나는 순간적으로 마치 내가 친척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 나와 더불어 살갑게 살아온 친척이 내 손을 꼭 잡고 마지막으로 한 당부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나서 나는 나에게 묻기 시작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내가 가장 자주 들었던 어른들의 말씀이 무엇이었는지를.

사실 가장 감동적인 말씀은 가장 단순하고 소박한 말씀인 경우가 많다.

가령 병석에 있는 친척을 병문안 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흰 종이처럼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그러나 반색하며 병상의 어른들은 나에게 물으신다.

“뭐 하러 와? 아직 바깥이 춥지?” 그리곤 잠시 염려하는 낯빛으로 “집안은 모두 편안하지?” 다시 별빛처럼 마음 모퉁이가 환해져 “애가 몇 살이더라? 어이쿠,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그리고 쾌차를 빌면서 나서려 할 때 “부모님 잘 모셔라.” 이런 순하고 무던한 말씀 앞에서는 머리를 깊숙이 조아리게 된다.

임종을 앞둔 붓다의 모습도 극히 평범하고 인간적이었으며 말씀 또한 그러했다. 병을 앓고 있던 부처는 제자 아난다에게 말했다.

“아난다야, 이제 내 나이 여든이 되었구나. 이 몸도 늙을 대로 늙어 내 삶도 거의 끝나가고 있다. 마치 낡은 수레를 가죽끈으로 얽어매어 지탱하고 있듯이 내 몸도 그와 같다.”

아난다가 깨달음을 얻지 못해 슬퍼하고 있는 것을 알고서는 “아난다야, 슬퍼하지 말고 울음을 그만 멈추어라. 사랑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반드시 헤어지게 마련이라고 전부터 말해오지 않았느냐? 너도 네가 할 일을 잘 해왔다. 너도 이제 열심히 정진해라”며 자상하게 위로를 하기도 했다. 그 후 붓다는 세상이 덧없고 무상함을 거듭 설법했고, 석 달 뒤 열반할 것을 선언했다.

붓다는 임종하면서 “부디 게으르지 말고 스스로 노력해 너희 자신을 구하도록 해라”는 말씀을 남겼다.

『유행경』에서는 붓다가 큰 가사를 네 단으로 접어 오른쪽 옆구리에 고이고 마치 사자처럼 다리를 포개고 누웠으며, 얼굴은 서쪽을 향하고 머리는 북쪽으로 두었다고 적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지금 한창 사순절(四旬節) 기간이고, 불교계에서는 붓다가 열반한 열반재일을 며칠 앞두고 있다.

나는 이 세상을 살다간 사람들의 마지막 말씀을 떠올려 본다. 땅을 촉촉하게 적시는 봄비 같은 말씀들을. 한 칸 집 같은 삶의 옹색함 속에서도 가만가만 들려주던 봄볕의 말씀들을. 내 몸 둘레에 가득 남은 말씀들의 매화꽃 향기를. 너무 평범해서 살아 있는 우리가 자꾸 잊게 되는 마지막 말씀들을.

문태준 시인
2009.03.07
출처 : 50-70대의사랑과 추억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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