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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계와 바다와 지금 / 제이 그리피스

유앤미나 2012. 6. 21. 17:46

시계와 바다와 지금 / 제이 그리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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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에서 가장 광범위하게사용하는 단어가 time(시간)이라고 한다. 타임은 
타이밍 혹은 끝을 의미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24시간주기(circadian)의 시간
이 있고 꿀벌의 시간과 젓소의 시간과 코코넛의 시간이 있다. 오티스와 함께 낭
비될 수도 있고 프랭클린과 함께 팔릴 수도 있으며, 제대로 될 수도 잘못될 수
도 있고, 과거 혹은 미래 혹은 현재일 수도 있다. 영국의 물리학자 M.패러데이
는 1812년에 B.아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길면
서도 짧은 것, 가장 작게 나눌 수 있으면서도 가장 길게 늘릴 수 있는 것, 가장 
하찮은 것 같으면서도 가장 회한을 많이 남기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없으
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사소한 것은 모두 집어삼키고, 위대한 것에게는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시간입니다." 스티븐 호킹의 
표현을 빌리면 "유일하고 절대적인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배적인 캘린더가 자신의 헤게모니를 고집할지라도, 그와 대립되는 캘린더
가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있다. 나무줄기와 인간신체 줄기의 수액에서 바로 그 
시간을, 저 파릇파릇 생동하는 순간과 새싹의 첫 향기의 아픔과 실제로 우리의 
귓전을 간질이는 초록빛 소리를 퍼올리는 봄을 당신은 막을 수 있는가. "초록 퓨
즈(fuse)로 꽃을 피우는 그 힘은/나의 초록나이를 피우네"라는 딜런 토머스의 
시구는, 자연의 시간을 예리하게 노래한 헨리 소로의 다음 묘사의 화답이다.
     우리의 생명과 자연의 생명의 합일을 거룩하게 보존하고 보호하고 지켜나가
자. ...봄의 버드나무 생명처럼 나의 생명은 본질적으로 현재에 속하는 것. 버드
나무의 화수(花穗)가 부풀어오르고 그 노란 줄기가 빛나고 수액이 흐르는 지금, 
지금,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버드나무 피리를 불지 못하리.
     일찌기 자연은 가장 거대한 공공의 시계였다. 자연의 리듬은, 협동으로 일하
고 자연의 풍경이나 계절에 맞추어 공동으로 경배하고 공동으로 씨앗 뿌리고 수
확하는 '시간공동체'를 세웠다. 이 공동의 시간의 표지(標識)를 하나하나 잃어버
리자 근대성은 그 자리를 대신할 대체물들을 만들어냈다. 그 무엇보다도 시간과 
계절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텔레비전이 자연을 대신하여 공공의 시계와 캘린더
가 되었다. 텔레비전은 여름에는 납량특집, 겨울에는 성탄특집 프로를 내보냄으
로써 계절의 변화에 존경을 표하며, 시청률이 높은 저녁 시간대의 신랄하고 자극
적인 프로와 쓸데없는 얘기나 늘어놓는 주간프로로 밤과 낮을 구분한다. 게다가 
토요일 저녁에는 알코올과 피자를 선전하고 일요일에는 숙취향을 선전하면서 
광고에서까지 안식일을 지킨다. 전국을 동시에 뜨겁게 달구는 복권추첨 시간이 
만약 불규칙했다면-혹은 방영되지 않았다면-아마 그 열기는 지금보다 훨씬 수
그러들었을 것이다. 
     고대그리스인들은 시간의 다양한 측면에 맞추어 그 각각의 신을 두었다(가령 
결혼예식의 신, 말들이 놀라 날뛰는 순간의 신, 잔치의 여흥이 갑자기 사라지는 순
간의 신이 따로 있었다). 가장 중요한 신은 절대적이고 직선적이고 연대기적이며 
수량화될 수 있는 시간을 주관하는 크로노스였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에게는 또 다
른 시간의 신, 훨씬 다채롭고 파악하기 힘든 카이로스(Kairos)가 있었다. 카이로스
는 타이밍의 신, 기회의 신이요 행과 불행, 길조와 흉조 같은 시간의 서로 다른 측
면들의 신이었다. 질적인 시간이라고 할까.
     만약 당신이 시계시간에 맞추어서 잠자리에 든다면 그것은 크로노스적 시간이겠
지만, 피곤해서 잠자리에 든다면 그것은 카이로스적인 시간이다. 배가 고파 비스킷
을 먹는다면 그것은 카이로스적이며, 시계를 보고 식사를 한다면 크로노스적이다(영
국에는 늦은 아침으로 간단하게 우유에 타서 먹는 시리얼 상품 중 '11시'라는 것이 
있다). 당연히 어린아이들은 이 시계시간에 눈뜨기 전까지는 카이로스적으로 산다.
     고대그리스인도, 현대서구인들도 크로노스를 카이로스보다 우월하게 여긴다. 하
지만 점성술은 시간을 카이로스적으로 접근하는데, 예를 들어 힌두교 삶에서 개인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점성술사들은 시간에서 무지개 빛깔을 보
지만, 서구의 지배적인 캘린더는 엄밀하게 단 하나의 빛깔이다.
     카이로스적 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과 다른 감각으로 움직인다. 간단한 예로 도
시와 시골의 하루를 비교해 보자. 가장 크로노스적 시간인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앞
만 보고 미래를 향해 움직이며 하루의 흐름이 마치 쏜살같지만 하루 그 자체는 '그대
로 머물러 있다.' 왜냐하면 시간은 그 하루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고 문화적으로 주어지고 노동시간이나 러시아워에 의해서 정의되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하루는 지평선 너머에서 태양처럼 둥글고 금빛찬란하게 기어 올라와 
당신에게 다가오며, 시간은 당신을 향해 움직이고 태양 혹은 별 혹은 폭풍으로 정의
된다. 훨씬 카이로스적인 이 시간에서 미래는 (프랑스어에서 미래를 뜻하는 I'avenir
도 그렇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는 표현에서도 나타나듯이) 당신을 향해 오
며, 만약 당신이 현재-실제로 누군가가 한결같이 서 있는 오직 그 장소-에 서서 그대
로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면 시간은 당신의 뒤로 물러난다. 도시와 전혀 다른 이 같은 
시간경험은, 시골 혹은 시골로 향한 발걸음이 지나치게 도시화된 사회에서 활력소가 
되는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시골은 한결 부드럽고 친절한 시간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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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이 그리피스의 <시계 밖의 시간> 중 '시보와 바다와 지금' 중에서 -
출처 : 50-70대의사랑과 추억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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