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중의 예언자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 41)
복음은 언제나 공동체를 만들도록 이끌어 줍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 또한 우릴르 복음으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공동체가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서로 나누며 공존하는 공동생활로 어떻게 이끌어
주는지 파악할 수 있을 만큼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점은 이러한 변화가 그리스도교적 삶에서 매우 필요한 부분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믿는 것은 공동체지 개인이 아닙니다.
개인은 십자가를 효과적으로 짊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노고이며 책임입니다.
함께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만이 복음적 생활방식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동체가 존속하며 계속 성장하는 데 필요한
'선물들' 을 나열했습니다.
"바로 그분이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선물들을 은총으로 주셔서 어떤 사람들은 예언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들은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활동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에페 4, 11-12)
이 기능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기반이 되는 것으로 이 중에서 예언직만큼 많은 비판이나
오해를 받는 기능도 없습니다.
예언자는 공동체를 사랑하기에 공동체가 정도(正道)에서 이탈했을 때 그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 기능은 인간 이성의 영역을 넘어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언자는 전 공동체를 자극하는 자신의 체험을 명확히 표현하고 이해하는 데
하느님에게서 영감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처럼 예언자는 공동체의 기본 목표를 분명히 말하며 그 목표를 이루는 데 사용되는 수단에 이
르기까지 이의를 제기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언자가 필요합니다. 많을 수록 좋습니다.
우리는 매우 근시안적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 관심사와 편견과 야망으로 인해 쉽게 정도에서 벗어납니다.
예언자들은 그런 자아만족에 빠지지 않게 해줍니다.
오늘날 예언자들이 더욱 쉽고 개방적으로 메시지를 전하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예언의 선물을 비판 능력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에서 비롯된 비판 정신은 소중한 선물이지만 예언은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공동체에서 인기있는 구성원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예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아닙니다.
예언의 선물은 역할이라기보다 직무로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이것은 예언의 선물이 공동체의 몇몇 구성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누구라도 언제든지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곧 성령께 마음을 열면 누구나 예언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울 때면 언제나 예언이 따릅니다.
갈론이나 회의 중에 예언을 할 수 있지만 그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언은 조용한 말씨, 이해와 격려의 눈빛, 또는 다른 무엇보다도 사랑을 우선시하라며
전 공동체를 자극하는 만남 가운데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절대적 침묵 가운데 예언의 말을 건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깊은 침묵과 기도로 초대합니다.
우리 중 한 명이 우리가 서약대로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직시하게 해주는 질문을 던지는 곳이면 어디에나 예언이 존재합니다.
예언은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이라는 분류 기준을 넘어섭니다.
예언은 항상 성령에게서 나와 진리와 사랑, 서로에 대한 용서,
하느님께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라는 복음적 가치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의 소리는 우리 가운데 계신 하느님의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에게서 도전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비록 당장은 그 말이 달갑지 않을지라도 귀를 기울이도록 합시다.
예수님의 성령이여,
예언의 말씀이 건네질 때
이에 응답하는 능력을 주소서.
제가 예언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게 되면
용기를 더해주소서.
「은총의 계절」 에서
게일 피츠패트릭 著 / 서한규 譯 / 바오로딸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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