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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야생화 씨앗 하나 남기는 것이 인생의 더 큰 의미

유앤미나 2010. 5. 20. 00:45
야생화 씨앗 하나 남기는 것이 인생의 더 큰 의미
아파트 짓던 손으로 야생화를 기르며

 
도시에서는 아파트를 지었습니다. 큰 회사를 경영하며 많은 집, 큰 집을 지어보았지만 성에 차지 않습니다. 더 이상 도시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영월 산속으로 들어와 통나무집을 짓고 야생화에 미쳐 살고 있습니다.

평생 아파트 짓는 일을 했던 사람이 강원도 영월의 산속에서 전원주택을 짓고 노후를 보내고 있습니다.
도시에 살 때는 시멘트와 철골이 그의 하루 일과였는데 이곳에서는 야생화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더 이상 도시가 필요하지 않아 시골로

황대석씨가 영월군 수주면 두산리에 들어온 지도 벌써 10년이 돼 갑니다. 그가 살고 있는 곳 옆동네의 이름은 무릉리, 도원리입니다.

한마디로 무릉도원인데 그만큼 경치가 좋기 때문입니다. 해발 800m가 넘는 매봉산과 배향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주천강이 집 앞으로 휘돌아 흐릅니다.

황대석 씨는 흔히 말하는 KS(경기고, 서울대)출신으로 정년퇴직을 하기 전까지는 서울 유명 건설회사의 부사장이었습니다. 대학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그가 한 일은 아파트를 짓는 것이었고 특히 철골조 전문가였습니다.

그런 그가 40여년간의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97년 아무 연고도 없었던 산동네로 이사를 왔습니다.
도시생활을 하면서 어릴 적 경상도 상주의 시골에서 살았던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습니다. 그래서 늘 나이가 들면 농촌에서 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의지대로가 아닌 수동적으로 살아야 하는 삶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살고 싶었던 것입니다. 95년 정년퇴직을 하면서 더 이상 서울에 있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이 들어 마땅한 일자리도 없었지만 하고 싶은 마음도 안 생겼습니다. 두 아들이 모두 대학생이라 심적인 부담도 없었습니다.

아파트 전문가가 공부해 지은 통나무집

시골생활을 위해 통나무집을 짓기로 하고 땅을 찾아 나섰습니다. 처음에는 경춘가도 주변의 남양주와 가평을 거쳐 춘천까지 돌아다녀보았지만 맘에 쏙 드는 곳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방향을 바꾸어 홍천, 여주, 이천 등지로 다녀보았지만 역시 이거다 하는 땅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흔히 땅은 주인이 있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란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좋은 땅이라 하더라도 궁합이 맞지 않으면 쓸모가 없어 보이고 남들이 별로라 여기는 것도 자신에게는 딱 들어맞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땅과 주인은 인연이 있어야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인연 때문인지 그렇게 찾기 힘들던 땅이 애초에는 전혀 계획이 없던 곳, 강원도 영월의 산속 두산리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황대석씨는 이땅을 처음 보았을 때 ‘이곳이다’란 느낌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망설이 필요도 없이 임야 7천평을 구입해 부지의 가장 상단, 전망이 좋은 곳을 택해 전원주택을 짓기로했습니다.

전공을 살려 통나무집을 직접 지어보기로 했습니다. 아파트와 철골조는 평생했던 일이라 자신이 있었지만 통나무집은 처음부터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외국 전문서적을 뒤져가며 통나무집에 대해 공부를 했고 설계도 손수 했습니다. 통나무집 관련 원서만 20여권을 읽었습니다.

황대석씨가 사는 집은 3층집으로 1층은 콘크리트로 하고 2층과 3층은 통나무집입니다. 1층을 콘크리트로 하여 안정감이 있고 집 전체를 통나무로만 한 것보다 싫증나지 않아 좋습니다.

집을 짓기 전 국산 통나무를 구해보았으나 쓸만한 것을 찾지 못해 캐나다 현지를 직접 방문하여 로키산맥에서 벌채하는 것도 보고 밴쿠버 근교의 목재공장도 네 곳이나 견학을 해보았지만 국내 환경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기후나 환경에 잘 맞을 것 같은 핀란드 목재를 선택했습니다.

96년 11월에 집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겨울공사를 하다보니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날이 많았습니다.
콘크리트를 타설한 후에는 얼지 않도록 비닐하우스를 씌워 양생을 했습니다.
그렇게 집을 짓기 시작한 지 다섯달이 지난 후 집은 완성되었고 입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지붕은 시다 쉐이크(목재)로 마감했고 1층 외벽은 주변에서 주워온 돌을 쪼개 붙여 나무와 돌이 조화를 이루도록 지었습니다. 데크를 포함한 집의 총 연면적이 84평인데 직영한 부분이 많아 평당 건축비는 350만원정도 들었습니다. 최대한 주위 환경을 살리는 집을 짓기 위해 중점을 두었고 그러다 보니 뒤는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인 언덕 위의 통나무집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도시에서 번 것들 다 투자하고도 즐거워

처음 전원생활을 계획할 때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두려움도 많았습니다. 어디가 좋고, 어떻게 집을 지어야 하며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등 모든 것들이 두려움이었는데 직접 뛰어다니며 부딪히면서 마음이 안정되었습니다.

입주를 한 후 부인 김순자씨는 적응하는데 많은 애를 먹었습니다. 서울토박이인 그녀는 전원생활은 남편의 꿈이었기 때문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반대하지 않고 따라나섰다고 말합니다.
그러다 막상 시골에 와 살아보니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습니다. 이사한 후 한달은 전화기를 붙들고 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김순자씨도 이제는 산촌생활에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처음에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텃밭 가꾸기가 소일거리가 되었고 음악을 전공한 인근 교회 목사 부인으로부터 배우는 첼로 연주에 재미를 붙여 살고 있습니다.

이들 부부에게 있어 지금까지 전원생활은 희망적이었지만 마치 신천지를 개척하는 것과 같았다는 것이 황대석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신천지를 개척하여 지금은 심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으며 마음 가는대로 자신이 원하는 일을 맘껏 하며 자유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는 채소를 키우고 벌을 칩니다. 전원생활에서 가장 많이 신경 쓰고 투자도 가장 많이 한 것이 야생화 재배입니다. 취미로 시작한 일이지만 전문가가 됐습니다. 1천평 규모의 밭은 야생화 비닐하우스 4동을 지어 야생화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그는 전원생활을 시작하면서 틈나는 대로 야생화 재배단지를 찾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고 재배기술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가 현재 집에서 기르고 있는 자생식물과 야생화는 400종을 넘습니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번 돈과 퇴직금을 투자해 영월에 땅을 사고 집을 짓고 야생화에 빠져 전원생활을 하는 황대석씨에게 전원생활의 손익을 물어보았습니다.

도시에서 벌었던 돈 전부를 전원생활 10여년 만에 거의 소진하고 이제는 터와 집과 야생화 밖에 남은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연금을 타는 것이 소득의 전부지만 노후에 그의 삶은 어느 것과 바꿀 수 없을 만큼 윤택했고 지금도 윤택해 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야생화를 가꾸기 위해 농장에 앉아 땀을 흘리다보면 안으로 자꾸 깊어지는 것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적적해서 어떻게 그 산속에서 사느냐고 묻는 사람들도 주변에 있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산속에서 살다보면 몸 안에 있던 기름기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마음도 비우고 나면 야생화며 풀이며 주변의 숱한 자연들이 수시로 마음을 채워주기 때문에 적적할 틈도 심심할 틈도 없다고 말합니다.

땡볕에 앉아 잡초를 뽑다보면 힘들기도 하고 무상무념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음의 텃밭에 자란 수없이 많은 잡초가 하나씩 뽑혀 나가 몸도 마음도 개운해 지는 것을 느낍니다. 최근 들어서는 좋은 야생화 종자 하나 제대로 남기고 가는 것이 그 어떠한 삶보다 세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고 떠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전원생활을 하는 참맛입니다.

도시민이라면 한번쯤 꿈꾸는 전원생활을 하기 전에 철저한 준비가 우선돼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왜 전원으로 가는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에서부터 마음의 준비는 됐는지에 대해 스스로 확신이 서야 합니다.
또 하나 욕심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황대석씨가 전원생활을 통해 후회한 것이 있다면 초기에 너무 많이 투자를 했다는 것입니다. 집이나 터를 작게 만들어 시작했다면 지금보다 더 자유로울 수 있고, 하고 싶은 일들을 더 많이 하면서 살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합니다.
출처 : 카이로프랙틱코리아
글쓴이 : 살로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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